(edaily 리포트)헌재 리(Lee)의 ‘입춘절기론’

by박동석 기자
2004.07.09 17:47:17

[edaily 박동석기자] 경기가 영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기업은 기업들대로 몸사리기에 나섰고, 소규모 생계형 가게들 조차 줄줄이 문을 닫고 있습니다. IMF때 보다 어렵다는 푸념이 더 이상 과장이 아닌 듯 합니다. 그런데 정부만 유독 우리 경제가 좋아지고 있다는 낙관론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이 느끼는 체감경기와 정부가 느끼는 지표경기간에 엄청난 괴리가 있는 것일까요. 경제부 박동석 기자가 전합니다. 헌재 리(Lee).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을 따로 부르는 닉네임입니다. 관가가 몰려있는 과천이나 여의도 증권가 시내 은행가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별칭이지요. 흔히 친구들 사이에서도 이름을 이렇게 서양식으로 바꿔 부르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그렇지만 ‘헌재 리’라는 닉네임에는 확실히 다른 구석이 있습니다. 시장에서 ‘헌재 리’는 곧 ‘위엄’입니다. 영향력입니다. 굳이 칼을 빼지 않더라도 그 이름만으로도 제압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헌재 리’가 갖는 파워는 올 2월 부총리로 임명될 때도 증명이 됐습니다. 카드문제로 시끄럽던 시장이 ‘헌재 리’가 경제사령탑으로 온다니까 쥐죽은 듯 조용해 진 것이지요. 그 당시 4.15총선을 앞둔 열린우리당 사람들은 깜짝 놀라더군요. ‘헌재 리’가 갖고 있는 힘이 그렇게 무시무시할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헌재 리’는 부총리로 임명될 때 총선용 카드라는 말이 많았지만 선거가 끝난 뒤에는 그 얘기가 쑥 들어갔습니다. 그만큼 그의 영향력과 리더십이 출중하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요사이 ‘헌재 리’가 좀 이상하게 바뀌어 가는 것 같다는 소리가 들립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왜냐구요? 그 출중한 영향력과 리더십을 참여정부와의 코드를 맞추는 데 허비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얼마전 청와대에서 ‘경제위기론’=’음모론’이란 잣대를 제시한 후부터 경제의 코드는 ‘낙관론’인 게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후로 정부 관계자들의 경기 전망은 ‘장밋빛’일색으로 변해갔지요. 외국 연구기관이나 애널리스트, 민간연구기관들이 경기 전망을 어떻게 얘기하든 남의 얘기에는 콧방귀도 뀌지 않습니다. 시장은 그래도 ‘헌재 리’만은 다를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기대는 여지없이 빗나가고야 말았지요. 그동안 수없이 쏟아낸 말들을 보면 ‘헌재 리’는 마치 정부의 경기 낙관론을 전파하는 사도인 듯 싶습니다. 지난3월에는 “올해 6%대 성장도 가능하다”고 했고 4월에는 “고용과 소비회복이 2분기 부터 가시화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그것 뿐인가요. 지난달에는 “여성과 노인의 경제활동 참여가 추가되면 내년에 6%성장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9일에는 갑자기 ‘입춘절기론’을 들고나왔습니다. 입춘(立春)은 이십사절기의 하나로 대한(大寒)과 우수(雨水) 사이에 있습니다. 보통 2월 4일쯤에 찾아오는 데 이 무렵에 봄이 시작된다해서 입춘이라고 부르지요. ‘헌재 리’는 정례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이 현재 경기상황에 대해 묻자 "지금은 경기가 한해중 2월초 정도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라며 말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입춘이 들어있는 2월초는 실제로는 거의 겨울의 한가운데"라며 "서양에서는 3월 하순이 돼야 봄의 시작이라 하는데 우리는 2월초가 되면 봄을 이야기한다"고 했습니다. ‘헌재 리’는 "그런 면에서 (경기는) 지금이 입춘절기라 할 수 있다"며 "아직은 꽁꽁 얼어붙어 있는 겨울이지만 기후 자체는 봄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습니다. ‘헌재 리’의 진단이 제발 현실과 맞았으면 하는 바람이 굴뚝 같습니다. 그렇지만 ‘헌재 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국민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최근 발표되는 경기지표들을 고려하면 ‘헌재 리’의 입춘절기론은 무모해 보일 정도입니다. 지난 6월 소비자 기대지수는 92로 올들어 최저치를 기록했습니다. 경기가 어려워 경마장 매출까지도 줄었다는군요. 백화점을 비롯한 소매업 매출은 지난 5월 2.2%가 감소해 16개월째 하락세를 이어갔습니다. 어디 그 뿐 인가요. 물가는 지난 6월 3.6%로 전년동기 대비로는 올들어 최고 수준까지 올랐습니다. 물건이 안팔리는 탓으로 공장재고율도 93.8%로 90%대의 고공행진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민간연구기관들은 하반기 들어서면 경제의 버팀목인 수출마저 둔화될 것이라며 경제성장전망을 줄줄이 내리고 있습니다. 외국기관들도 마찬가지이지요. 시티는 내년 우리나라 경제전망을 6.0%에서 4.5%로, CSFB는 5.7%에서 4.2%로 각각 낮춰 잡았습니다. 미국의 경제예측 전문기관인 ‘컨센서스 이코노믹스’도 지난달 말에 우리나라의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당초 5.6%에서 5.5%로 0.1%포인트 낮춰서 발표했더군요. 일부에서는 경기가 잠깐 회복세를 보인 후 다시 하락하는 더블 딥(Double Dip)의 가능성도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경기 하락에 대한 경고는 국내외가 따로 없습니다. 정부만이 유일하게 좋아질 것이라고 우기는 형국입니다. ‘헌재 리’는 ‘왜 정부만 경기를 장밋빛으로 보느냐’는 투의 질문에 ‘통계의 착시현상’을 거론했습니다. 전년대비로 경제를 판단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는 얘기입니다. 아마도 수출은 앞으로도 잘 될 것인데 지난해 4분기 후 수출이 급증한 탓으로 연말로 갈수록 (전년대비)수출증가율이 둔화될 것을 염두에 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통계의 체계를 개편하고 통계청장의 직급을 높이겠다”는 말도 했습니다. 물론 경제부총리 입으로 경기가 나쁘다는 말을 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요. ‘헌재 리’가 입춘절기론까지 꺼낸 뜻은 다분히 심리적인 효과를 겨냥한 듯 보입니다. 경제에서 심리가 갖는 위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말하자면 ‘헌재 리’의 리더십과 영향력을 심리전에 활용하려는 전략전술이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경제에 자신감을 심어줄 목적으로 추경도 적당히 짜고 건설경기 연착륙 방안과 중소기업 종합대책도 물렁하게 내놓은 모양입니다. 불행히도 ‘헌재 리’의 낙관론을 수긍하는 경제 주체들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일자리도 줄고 물건도 안 팔려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 데 ‘입춘 절기’라는 수사가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요. 요즘은 경기가 얼마나 안 좋은 지 잘 되는 장사가 ‘간판업’밖에 없다는 우스갯소리도 들립니다. ‘헌재 리’가 참여정부의 코드만을 의식할 게 아니라 서민들의 고단함까지도 포용할 수 있는 진지함을 보여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헌재 리’의 진면목이 살아날 것 같아서 입니다. 뜬금없이 지난 6월 한국을 방문했던 모건스탠리의 아시아 태평양 이코노미스트 앤디 시에 가 한 말이 생각납니다. “한국의 최근 수출 증가는 경쟁력 향상 때문이라기보다는 중국으로의 공장 이전에 따라 한국 기업이 중국의 자사 공장에 판매한 중간재가 수출로 집계되기 때문에 나타난 착시현상이다.” ‘헌재 리’가 말한대로 통계의 착시현상도 중요하겠지만 보다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착시도 있을 수 있다는 지적이지요. 앤디 시에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만약 수출마저 신기루에 불과하다면…’ 정말 걱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