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公娼制를 원한다"

by조선일보 기자
2004.10.14 21:19:30

수원 집창촌 단속반대 성매매여성 대표…"병든 어머니 부양해야"

[조선일보 제공] 늦은 밤 전화가 걸려왔다. 휴대전화의 액정화면에는 ‘별나라 ☆★ 공주다’라는 문구가 떴다. ‘별나라 공주’라니 대체 누굴까. 전화를 걸어온 이는 “저 김문흰데요” 했다. 다음날 인터뷰하기로 약속돼 있었던 경기도 수원지역 집창촌 단속반대 성매매 여성 대표였다. 그는 격앙된 어조로 “인터뷰를 못하겠다”고 했다. 모 방송사의 성매매 특별법 관련 토론 프로그램 토론자로 내정돼 있었던 성매매 업주 모임 ‘한터’ 사무국장이 여성부측의 반발로 토론에 참여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언론은 다 똑같다. 결국 정부 편만 들고 우리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것”이라며 흥분했다. 그를 진정시켜 설득하는데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우여곡절 끝에 김문희(30·가명)씨를 만난 것은 13일 오전, 수원역 근처의 한 커피숍에서였다. 불그스름하게 염색한 머리, 옅게 화장한 얼굴, 청바지에 검정 가죽 자켓을 받쳐입은 그는 강아지 한 마리를 안고 나왔다.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요.” 그는 소파에 강아지를 내려놓더니 육포를 입에 물리고 어르기 시작했다. 생후 3개월된 이 시츄 애완견에게는 ‘유키’라는 이름이 있었지만 그는 강아지를 ‘우리 아들’이라고 불렀다. “사람보다 나아요. 나 기분 안 좋으면 알아채고, 배신도 안 하고, 주인 뒤통수 치는 일도 절대로 없죠. 주인이 아무리 소리 지르고 해도 곁을 떠나지 않아요. 애교 부리면서 끝까지 남아있죠. 혼자 있을 때 밖에서 발소리 나고 하면 무서운데 요거 한 마리만 있으면 안심이 되잖아요.” 그는 지난 7일 난생 처음으로 집회라는 것에 참가했다. 전국의 성매매 여성 3000여명이 성매매 특별법에 항의해 여의도에 모여 벌였던 그 집회에서 그는 사회를 봤다. “나도 내가 이렇게 발 벗고 나서게 될 줄 미처 몰랐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지난달 23일 성매매 특별법이 시행돼 나가던 업소가 문을 닫게 되자 자발적으로 수원지역 성 매매 여성 대표를 맡았다고 했다. “화가 나잖아요. 정부 측에서 우리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극소수의 피해여성 설문조사 결과만 보고 멋대로 결정해서 일을 못하게 하니까요. 이제 우리는 동서남북 다 뒤져봐도 갈 데가 없어요. 말 그대로 길거리에 나앉게 생긴 거죠.” 강원도의 소도시 출신인 그는 스무 살 때부터 룸살롱에서 일하며 이른바 ‘화류계 생활’을 시작했다고 했다. 다니던 고등학교는 1학년때 중퇴했다. 폐병을 10년 넘게 앓아오던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등록금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몸도 약한데다가 오랜 기간 아버지 병수발을 드느라 더욱 쇠해진 어머니는 일자리를 얻을 만한 여건이 되지 못했다. 어머니와 함께 친척집을 전전하면서 그는 어떻게든 취직을 하기 위해 애썼다. “옷가게, 빵집, 휴게소, 일식집, 레스토랑 서빙, 볼링장 아르바이트…. 안 해 본 게 없어요.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으니 번듯한 직장에 어디 취직이 되나요? 간신히 사촌언니 이력서를 위조해 경리로 위장취업했다가 사흘만에 그만뒀어요. 타자도, 부기도 할 줄 모르니 일을 감당할 수 있어야지요.” 그는 스무 살 때 상경했다. 서울에서 취직해 있던 고교 동창은 그 때까지 한 번도 서울에 가 본적이 없던 그에게 대도시에 대한 환상을 불어넣었다. “서울이 너무 궁금했어요. 다른 세계로 생각했죠. 서울에서 직장다니겠다고 결정하고 어렵사리 엄마한테 허락을 받아 나왔어요.” 그러나 서울살이는 결코 녹록치 않았다. 지방 출신인데다가 고등학교도 마치지 못한 그를 받아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번듯한 직장에 취직해 있는 줄 알았던 친구는 알고 보니 술집에 나가고 있었다. “당시에는 도저히 친구를 용서 못하겠더라구요. 내 친구가 글쎄 술집에 나간다니…. 그런데 친구의 설득에 넘어가 친구가 일하는 곳에 한 번 가봤다가 생각이 바뀌었어요. 벌이도 괜찮고, 생각만큼 나쁘지 않았어요.” 그는 자연스레 친구의 전철을 밟았다. 배가 고팠기때문이라고 했다. “사발면 사먹을 돈 270원이 없어서 1주일을 굶은 적도 있어요. 설상가상으로 얹혀있던 친구는 저 몰래 방 보증금을 빼 가지고 어딘가로 달아나버렸어요. 졸지에 올 데 갈 데 없는 신세가 됐죠. 엄마한테는 걱정 안 끼쳐드리려 취직했다고 거짓말했는데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 이후로 10년 가까이 그는 이 술집, 저 술집을 전전하며 전국을 떠돌았다. 다니던 술집이 망하면 다른 지역에서 일자리를 얻고, 그 곳이 망하면 또 다른 곳으로 옮기는 식이었다. “그만둘 수 있는 기회도 몇 번 있었어요. 다른 일자리를 구하려고 학원도 다녀보고 했는데 쉽지가 않더라구요.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정상적인 사무직은 도저히 안 되고 식당 서빙이나 옷가게 일밖에 없는데…. 그 저임금으로는 방값도 안 나오죠. 그러니 다시 뛰어들고…. 사회가 못 배운 사람들에게는 참 몰인정하다는 걸 그 때 알았지요.” 그는 2년 반 전 룸살롱 생활을 그만두고 집창촌으로 거취를 옮겨 본격적인 성매매를 시작했다고 했다. “어찌어찌하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왔어요. 여관에서 생활하면서 가게에 나갔는데 장사가 안 돼서 도저히 여관비를 댈 수 없더라구요. 그 술집뿐 아니라 경기가 안 좋아 다 그랬어요. 누구한테 손 내밀기도 뭐한 나이고…, 가지고 있던 패물을 다 팔아 겨울을 났지요. 그 생활을 한 달 넘게 하다보니 더 이상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결단을 내렸지요.” 그렇게 그는 경기도 파주의 한 집창촌으로 제 발로 걸어들어갔다. 처음에는 그 역시 집창촌 생활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지녔다고 했다. “룸살롱에서도 2차 나가곤 했지만 그거랑은 차원이 다르잖아요. TV 뉴스에서 본 것처럼 감금당하지는 않을까…, 무서웠지요.” 그러나 그가 일하게 된 업소의 주인은 그에게 가족처럼 잘해줬다고 그는 말했다. “무엇보다도 저를 믿어줬어요. 선불금이 3000만원이었는데 그 가게가 장사가 안 되길래 수원으로 옮기겠다고 하자 그러면 옮겨가서 갚으라고 할 정도로요. 여기 와서 다 갚았지요. 고마워서요.” 그는 현재 일하고 있는 수원의 업소에서도 인간적인 대접을 받고 있다고 했다. “저같은 경우는 안면풍이 있어서 스트레스 받거나 몸이 힘들면 입이 틀어져요. 그러면 우리 주인 언니는 주물러 주면서 막 울어요. 나 홀어머니 모시고 있는 거 아니까…. 불쌍해서 어쩌냐고, 아프지 말라고, 우리 꼭 건강해서 돈 많이 벌자고.” 룸 살롱에 나가던 시절보다 여기 일이 훨씬 수월하다고 그는 말했다. 룸 살롱 시절에는 술 취한 손님들의 비위를 맞춰주는 일이 고역이었지만 이 곳에서는 그냥 ‘관계’만 맺으면 되기 때문이란다. “컨디션 안 좋은 날은 일 안 해요. 업주들도 컨디션 안 좋은데 억지로 일 시켜봤자 손님도 흥 안 나고 손해라는 거 알기때문에 강요 안 합니다. 운 없게 매너 나쁜 손님이 걸리는 날도 도중에 박차고 일어나 들어가버리지요.” 그는 지난 달 22일 가게가 문을 닫은 이후로 단 한 푼도 벌지 못했다고 했다. 당장 방세며 생활비가 걱정이지만 ‘배 째라’는 심정으로 살고 있단다. “저축이요? 얼마 안 되지만 있긴 있어요. 그 돈은 절대로 못 빼 쓰죠. 내 꿈을 위한 건데요.” 자그마한 가게를 하나 차려 그 가게에서 스스로 디자인한 옷이며 장신구를 판매하는 것이 꿈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런데 이제 그 꿈을 이루는 길이 다 막혀버렸어요” 하더니 그는 어조를 높였다. “여성부에서 지원해주겠다는 돈은 1인당 한 달에 겨우 10만원이에요. 그것도 보호시설에 들어가는 사람에 한해서요. 창업자금을 대출해준다고 하지만 그것도 시설에서 6개월 과정을 수료하고 자격증을 취득한 사람 500명에 한해섭니다. 무책임하지요. 이렇게 계획도 없이 무작정 해 버리면 우린 어떡해….” 눈물이 날 것 같다고 하더니 그는 이내 울기 시작했다. 눈물을 훔쳐내면서도 그는 끝까지 말을 이었다. “창업대출금으로 3000만원을 받았다 치더라도 그걸로는 가게 전세금 얻기도 힘들지요. 어렵사리 창업하더라도 3년 내에 국가에 갚아야 하는데, 만약 못 갚으면 그것도 빚 아닌가요? 선불금은 까기라도 하죠. 이러면 우리는 빚쟁이밖에 더 되나요? 저뿐 아니라 다들 그렇게 생각합니다. 정부에서는 전국의 성매매 여성을 33만명으로 추산하는데 그보다 훨씬 더 됩니다. 38억 예산 들여서 대체 그들에게 얼마씩 지급할 수 있을까요?” 그는 “책임도 안 지는 것이 무슨 ‘보호’냐”고 했다. “시설에 있을 때 숙식제공하고 꽃꽂이 가르쳐주면 그뿐, 교육을 마친 후 취업을 책임져주는 게 아니라고 하더라구요. 기술 배운다 쳐요. 여기 아가씨들 대개 집에 달마다 송금하는 돈이 몇백입니다. 직장에서 해고당한 오빠들 대신 조카들 먹여 살리고, 병든 어머니 부양하고, 아버지 카드빚 갚는 아이들이 수두룩해요. 시설에서 배운 기술로 그만큼 돈 벌 수 있나요?” 그 자신도 고혈압과 관절염을 앓고 있는 어머니에게 생활비와 약값, 병원비를 포함해 매달 이삼백만원씩 송금하고 있다고 했다. 그의 어머니는 딸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술집에 나간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처음에는 남대문 새벽시장에서 일한다고 거짓말했는데 완전히 속일 수는 없더라구요. 술집 나간다고 했더니 어머니가 거품을 물고 쓰러지셨어요. 호적을 파겠다며 난리가 났었죠. 그런데 며칠간 생각해보시더니 그냥 ‘몸 조심하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는 “정부가 공창제(公娼制)를 도입해주길 원한다”고 했다. “우리가 원하는 건 바로 그거예요. 정부에서 투명하게 관리해주면 될 거 아닙니까. 우리 손님들 중에서는 한 번도 여자랑 관계맺어볼 기회 없는 장애인, 사회부적응자 등도 많아요. 외국인 노동자들도 많구요. 이렇게 모든 창구를 막아버리면 대체 그들은 어디에서 욕구를 해소하죠? 이런 식으로 하면 정말 성매매가 음성화 될 수밖에 없어요. 에이즈, 에이즈 하는데 공창제 도입되면 보건관리라도 철저히 하죠. 성매매 특별법이야말로 나라에서 우리를 세균 덩어리로 만드는 거예요. 인정할 부분은 인정해야지 밀고 나가지 말라는 겁니다.” 그는 “꼭 성매매를 근절하겠다면 일단 영업이라도 하게 해 주고 유예기간을 좀 더 주었으면 좋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지난 3월 특별법이 통과됐다는데 저희는 법 시행 보름 전에야 그 사실을 알았어요. 못 배운 사람들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배운 사람들이 배운 것답게 유연하게 대처해줬으면 좋겠네요.” 그는 스물 여섯 살 때 4년간 사귀었던 남자로부터 청혼을 받았지만 생각 끝에 거절했다고 했다. 결혼해보았자 결손가정을 만들 것 같았기때문이라고 했다. “아무리 서로가 좋아해도 결국 현실이 힘들면 무너지는 게 결혼생활 아닌가요? 지금은 돈이 사람을 우롱하는 시대니까요.” 평범한 삶에 대한 동경도, 미련도 더 이상 없다고 그는 말했다. “혼자라는 게 자유롭고 홀가분해서 오히려 좋아요. 그 때 결혼 안 한 것, 지금도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결혼해 버리면 우리 어머니 모실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요.” 그는 “일하는 게 정말로 즐겁다”고 했다. “여기 오시는 분들이 내게 감사하다고 할 때 보람을 느껴요. ‘정말 고마웠어요 아가씨, 아무도 상대 안 해주는 나같은 놈 상대해 줘서’라고 하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아요. 그냥 이야기 상대가 필요해 오는 사람들도 많지요. 그럴 때면 산전수전 다 겪은 경험 살려 상담원 노릇도 하고….” 그는 “정작 힘든 건 일이 아니라 우리를 동물원 원숭이 바라보듯 하는 주변의 시선”이라면서 “우리도 감정을 가진 인간”이라고 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예상과는 달리 그는 흔쾌히 승낙했다. 얼굴을 모자이크처리하겠다고 했더니 그는 웃으며 외쳤다. “괜찮아요. 그냥 내보내세요. 난 떳떳하니까,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