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재 누명 쓴 윤씨 진술 “32년 전 내 옆엔 아무도 없었다”

by장구슬 기자
2020.11.20 14:22:40

박준영 변호사, ‘이춘재 8차 살인’ 재심 청구인 최종 진술 전문 공개

[이데일리 장구슬 기자] “전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검찰이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재심 재판에서 재심 청구인 윤성여 씨에게 무죄를 선고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윤 씨는 최종 진술에서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라며 자신이 진범이 아님을 호소했다.

지난 19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리는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재심 결심 공판에 재심 청구인 윤성여 씨가 출석하며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지난 19일 수원지법 형사12부(박정제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이 사건 재심 결심 공판 최종 진술에서 윤 씨는 이같이 밝혔다.

윤 씨의 변호인으로 진범인 이춘재를 증인 신문한 박준영 변호사는 이날 윤 씨의 최종 진술 내용 전문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공개했다.

윤 씨는 최종 진술에서 “작년 이맘때 재심 청구를 하고 딱 1년을 맞이하게 됐다”며 “올해 추위도 빨리 시작됐는데 본격적으로 겨울이 오기 전에 모든 것을 끝내고 싶은 마음으로 다짐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왜냐하면 개인적으로 추운 게 싫다”며 “저는 20년 동안 교도소에 있었는데 추운 건 적응이 안 됐다. 겨울이 되면 교도소 안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싸늘함이 있었다”고 했다.

이어 “11년 전 출소했을 때 달라진 세상에 적응하기 참 힘들었다”며 “신용카드도 교통카드도 쓸 줄 모르고 답답했다”라고 털어놨다.

윤 씨는 “내가 20년 동안 교도소에 있었어야 할 이유는 뭘까, 왜 내가 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걸까, 왜 하필 나 일까, 32년 전부터 끊임없이 했던 질문을 혼자 또 던져보지만,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며 “32년 전 법정에 섰을 때는 옆에 아무도 없었다. 돈도 빽도 없었고 친구도 가족도 오가는 사람도 없었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3학년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고 밝혔다.

이어 “스물세 살에 살인자라는 죄명으로 구속될 때가 인생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생각지도 못하고 20년 세월을 교도소에서 보냈다”며 “사회와 장기간 격리되고 보니 나와서 사회 적응하기 무척 힘들었다”고 전했다.



윤 씨는 “하지만 이제는 제 주변에 너무나 좋으신 분들이 많다”며 “이번 재판이 끝나면 좋은 사람으로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는 “‘윤성여는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살겠다”라며 “(돌아가신) 어머니를 찾아뵙고 아들이 강해졌다고 세상 앞에 당당하게 있는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윤 씨는 끝으로 “올겨울은 작년보다 더 추울 거라는 기사를 봤다”며 “만약 제가 무죄 판결을 받게 되면 누구보다 따뜻한 겨울을 보내고 싶다. 저를 지켜봐 주신 모든 분들, 따뜻한 겨울을 맞이하길 두 손 모아 기도하겠다. 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덧붙였다.

박준영 변호사가 윤성여 씨의 최종 진술 전문을 공개했다. (사진=박준영 변호사 페이스북 게시물 캡처)
한편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은 1988년 9월16일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에서 박모(당시 13세) 양이 자택에서 성폭행당하고 피살된 사건이다.

당시 경찰은 인근 농기구 공장에서 근무하던 윤 씨를 범인으로 지목해 자백을 받아냈다.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윤 씨는 경찰의 강압수사에 의한 허위자백이었다고 항소했지만, 2심과 3심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윤 씨는 20년간 복역한 뒤 지난 2009년 8월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이후 지난해 9월 이춘재는 8차 사건을 포함해 경기 화성군에서 발생한 10건의 살인사건과 또 다른 4건의 살인사건 모두 자신이 저지른 범행이라고 자백했다. 이에 윤씨는 박 변호사와 법무법인 다산의 도움을 받아 지난해 11월13일 수원지법에 재심을 청구했다.

지난 19일 검찰은 “피고인에 대한 유죄 인증 증거는 당시 수사 과정에서 한 자백 그리고 피고인의 체모와 사건 현장 체모가 동일하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 결과였다”면서 “그러나 피고인의 자백은 경찰의 폭행·가혹 행위에 의한 것으로 객관적 상황에 부합하지 않고 사건을 자백한 이춘재의 진술은 신빙성이 높다”고 밝혔다.

또한 검찰은 윤 씨에게 “검찰은 수사의 최종 책임자로서 20년이라는 오랜 시간 수감 생활을 하게 한 점에 대해 피고인과 그 가족에게 머리 숙여 사죄한다”고 밝혔다.

이 사건을 직접 수사하고 재심 공판에 참여해온 이상혁(사법연수원 36기)·송민주(42기) 검사는 이같이 사죄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윤 씨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춘재 8차 재심 사건에 대한 선고 공판은 다음 달 17일 열린다.

이춘재 고등학교 졸업사진(왼쪽), 1988년 작성된 화성연쇄살인사건 용의자 몽타주. (사진=채널A뉴스 화면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