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광대, 공옥진을 생각하며

by김병재 기자
2012.07.12 15:48:53

김병재의 문화칼럼

우리들의 광대, 공옥진을 생각하며

공옥진여사의 춤을 처음 구경한 건 80년대초 서울 원서동 공간사랑에서 였다. 4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 무대 옆으로 아쟁·대금·장구를 잡아놓은 검소한 무대였다. 당시는 5共,독재 군사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이었다. 공옥진의 춤은 당시 서민등의 삶의 질곡과 애환을 온몸으로 펼쳐냈다. 신명나는 놀이판이었다. 당시 말단 기자였던 필자는 여사의 춤을 보고 알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여사는 말 못하는 짐승의 모습으로 혹은 온전치 못한 병신의 몸으로 웃는지 우는지조차 분간 안되는 야릇한 얼굴로 춤추고 소리를 해댔다. 객석에선 웃고 있었지만 극장을 나서는 즈음엔 애써 감춰 놨던 그 무언가가 꿈틀 거림을 느꼈다. 언론인으로서 두 눈을 바로 뜨고 정색을 하며 얘기를 해야할 많은 것들을 여사가 빗대어 대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셰익스피어가 광대를 통해 세상을 풍자하듯 여사는 세상에게 투박하게 말을 걸고는 같이 신나게 놀자고 부추겼다. 병신춤, 곱사춤을 추는 공옥진의 모습은 서민뿐만아니라 80년대 당시 서글픈 지식인의 자화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공옥진의 공연은 1인 창무극(唱舞劇)이다. 혼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대배우가 아니면 할수 없는 영역이다. 혼자서 다양한 인물의 여러 연기를 하는 서양의 모노 드라마와는 차원이 다르다. 모노 드라마는 인물에 대한 이해와 변신할 수 있는 순발력만있으면 가능하다. 하지만 창무극은 우리 특유의 흥(興)과 한(恨)을 온몸으로 녹여 내야한다. 놀이성이 체화돼야 한다. 또한 최근 유행하는 뮤지컬에서한 배우가 여러 캐릭터를 하는 멀티(multi) 맨과도 다르다. 혼자서 공연전체를 리드해 가는 중심인물을 감방의 약초처럼 그때 그때 분위기를 띠우는 조연과는 비교 할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선생의 춤과 노래는 전통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직접 창작했다. 전통 춤사위에 신체와 동물들의 특징을 접목시켜 곱사춤·원숭이춤을 만들었고 거기에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를 곁들였다. 여사는 청각장애인이었던 동생과 척추장애를 앓았던 조카의 소외된 삶을 춤으로 승화시켜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예술인이었다.

이제 더 이상 공옥진의 춤을 볼 수 없다. 지난 2010년 6월27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춤을 춘 뒤 울먹이며 “공옥진이가 죽지 않으면 또 오겠습니다”고 무대를 내려간 여사가 지난 9일 타계했다. 서민들의 천대와 멸시를 해학적으로 풀어냈지만 정작 여사 본인은 세상의 천대와 멸시를 받고 살았다. 판소리 명창 아버지 공대일 선생에게 창을 배운 여사의 말년은 씁쓸하기만 했다. 전남 영광의 예술연구소에 마련된 4평짜리 방에서 생활하며 1인 창무극을 지켜오던 여사는 국민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돼 매달 43만원의 생활비를 지원받으며 살았다고 한다. 질곡의 80년대를 익살과 해학으로 풀어낸 민중 예술인이었고, ‘1인 창무극’이란 한국 예술의 새로운 공연장르를 개척한 예인에 대한 세상의 대접이 이 수준이다. 참으로 부끄러운 문화예술의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