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맹 北 밀어내고 최고 귀빈석에..동북아외교 우위 계기

by이준기 기자
2015.09.03 14:49:33

[베이징=이데일리 이준기 기자] 박근혜 대통령이 3일 오전(현지시간) ‘군사굴기’(軍事堀起: 군사적으로 우뚝 일어섬)를 과시하는 중국의 전승절 열병식에 참관한 건 달라진 한·중-북·중 관계를 바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정확히 61년 전인 1954년 마오쩌둥 당시 중국 주석과 톈안먼 망루에 나란히 섰던 김일성 전 북한 주석의 자리를 박 대통령이 꿰찼다.

반면 북한 대표로 참석한 최룡해 노동당 비서는 시 주석을 중심으로 오른쪽 맨 끝에 배치됐다. 65년전 한국전쟁 이후 ‘혈맹’인 북한을 밀어내고, 총구를 마주했던 한국의 대통령을 최고 귀빈으로 앉힌 건 동북아 안보지형의 급변을 상징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노란 자켓을 착용한 박 대통령의 자리는 광장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시 주석의 오른편 두 번째였다. 시 주석의 바로 옆자리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몫이었다. 박 대통령 옆으로는 누르술탄 나자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 이슬람 카리모프 우즈베키스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내외 등이 자리했다. 시 주석 오른쪽으로는 외국 정상들이, 왼쪽으로는 중국 주요 인사들이 자리를 잡았다.

박 대통령은 망루에 앉기 전까지 모두 4차례에 걸쳐 자리를 바꿨다. 행사 시작 전 진행된 정상 및 외빈들과의 단체 기념사진 촬영 때 시 주석의 부인인 펑리위안 여사를 사이에 두고 시 주석의 왼편에 섰다. 시 주석 오른편은 역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차지였다. 앞서 박 대통령이 행사장에 입장하면서 영접을 받으며 시 주석 내외와 기념 촬영을 할 때는 시 주석의 오른쪽에 섰다. 박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성루에 오를 때는 시 주석의 왼쪽에 서서 걸었다.

자리배치로만 봐서는 중국이 러시아, 한국, 카자흐스탄 순으로 예우한 셈이 됐다. 그러나 중국의 ‘군사 굴기’ 이벤트인 전승절 행사에 미국의 우방국 중 유일하게 성루에 오른 박 대통령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자리라는 평가가 나온다. 자칫 박 대통령이 넘버1 예우를 받았을 때 한국의 ‘중국 경사론’은 더 확대됐을 수 있었던 탓이다.



반면 중국 측은 최 비서의 자리를 외국 정상 및 국제기구 수장 50여명이 위치한 오른쪽 맨 끝열에 배치해 최근 소원해진 북중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친중(親中)파인 장성택 처형 이후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에 대한 ‘불만’이 여전하다는 점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박 대통령은 이날 행사 곳곳에서 푸틴 대통령 등 외국 정상들과 자연스레 대화했다. 행사 도중 박 대통령은 눈부신 햇살을 피하기 위해 선글라스를 끼기도 했다.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한반도 및 지역 문제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갔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관심을 모았던 최 비서와의 조우는 불발됐다. 전날 시 주석 내외 주최의 환영만찬과 이날 열병식 과정에서 마주칠 기회가 수차례 있었으나 갈렸다.

박 대통령의 열병식 참석은 오랜 동맹관계를 유지해온 미국와 일본의 부정적 기류라는 외교적 부담 속에서도 기존에 한반도 주변 강국의 이해관계에 이끌려왔던 기존 행보에서 벗어나 선제적이고 주도적인 행보에 나서는 단초를 마련한 셈이다. “외교에 있어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겠네’라고 생각하면 우리나라 국격에도 맞지 않는 패배의식”이라는 평소 소신을 실천한 셈이 됐다.

하지만 중국 열병식이 미국과 일본에 대한 군사적 과시 성격이 짙은 데다, 박 대통령의 ‘파격 행보’가 자칫 한.미.일 3각 공조의 틀을 허물 수 있다는 우려가 팽배한 점은 부담이다. 실제로 이날 열병식에 참석한 국가 정상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미국과 일본의 불참에 이에 미국 우방국 참석이 전무한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만 유일하게 성루에 올랐다.

박 대통령은 전날(2일) 시 주석과의 회담에서 한·중·일 3국 정상회의에 대한 합의를 끌어내, 연내 한·중·일 3국 정상회의를 주도하고, 더 나아가 한.일 정상회담까지 단행, 향후 동북아 외교전에 위를 점하겠다는 구상이다. 이 과정에서 불거질 수 있는 ‘중국 경사론’은 10월16일 한미 정상회담을 통한 견고한 동맹 과시로 불식시키겠다는 게 정부와 청와대의 생각이다. 특히 집권 3년차를 맞아 미·일 간 신(新) 밀월관계 속에서 주변국과의 외교관계에서 소외당하고 있다는 지적도 단박에 불식시켰다. 박 대통령이 더 나아가 미ㆍ중 두 초강대국 사이에서 주도적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는 점도 재확인했다는 분석까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