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때아닌 소비지출 '붐'…전시 체제 전환후 실질임금 '껑충'
by방성훈 기자
2024.07.26 15:40:17
전시 경제로 방산 호황·인력부족에 실질임금 14% 상승
상품·서비스 소비도 25% 급증…"지갑 쉽게 열려"
실질임금 올해 3.5% 더 오를듯…여가·주담대 등 수요↑
재정적자 속 정부 의존해 성장…경기과열·인플레 우려
[이데일리 방성훈 기자]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한 직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음식점 주인인 안톤은 사업이 최악의 상황에 직면할 것을 우려했다. 외국인 방문객들이 사라지고 러시아 경제가 붕괴될 것이란 흉흉한 소식이 연일 쏟아졌다. 금리가 급등하고 화폐가치는 폭락했다. 하지만 2년이 지난 현재 안톤의 걱정은 사라졌다. 외국인은 없어도 러시아 손님들이 기꺼이 지갑을 열고 있어서다.
러시아가 때아닌 소비 열풍에 휩싸였다. 전시체제로 전환한 이후 근로자들의 실질임금이 늘어나면서다. 실질임금은 명목임금에서 물가상승 효과 제거한 급여를 뜻한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25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미국과 유럽 등 서방국가들이 러시아에 제재를 가하면서 러시아 경제가 악화할 것으로 전망됐으나, 현재 러시아에선 소비지출 붐이 일고 있다”며 “전쟁 장기화로 전시 방위산업이 호황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러시아 기업들은 현재 인력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산하 경제연구소에 따르면 러시아는 현재 480만명의 노동력 부족에 직면해 있다. 대다수 러시아 젊은이들이 전쟁 초기 국외로 도피하거나 우크라이나 전쟁을 위해 징집됐기 때문이다.
아울러 러시아는 지난해부터 경제를 전시 체제로 전환하고 군수산업을 풀가동하고, 민간기업에서 일하던 근로자를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급여 인상은 물론 방산업체에서 근무하면 징집면재라는 ‘당근’을 제시해 수많은 근로자가 직장을 옮겼다.
민간기업들은 직원들을 붙잡아두기 위해 울며 겨자먹기로 급여를 인상했고, 결과적으로 실질임금이 크게 뛰었다. 모스크바 소재 창업 및 경제 개발 연구소는 “임금인상과 보너스 지급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산업 부문에 걸쳐 90% 이상의 기업이 노동력 부족을 겪고 있다”고 전했다.
러시아 통계청에 따르면 전쟁 이후 실질임금은 약 14% 상승했고, 이에 따라 상품 및 서비스 소비가 약 25% 늘었다. 실업률은 2022년까지만 해도 7~8%로 치솟을 것이란 경고가 나왔으나, 지난 5월 2.6%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데니스 만투로프 러시아 제1부총리는 이달 발표한 성명에서 방산 분야에서 지난 2년 동안 임금이 30~60% 올랐다고 강조했다. 정치학자 예카테리나 쿠르방갈레바는 방산 부문뿐 아니라 “2021년 12월에 월 250~350달러(약 35~49만원)를 벌었던 직공들은 이제 월 1400달러(약 194만원)를 벌 수 있다. 택배기사도 한 달에 20만루블(약 324만원)을 번다. 장거리 트럭 운전기사들의 평균 급여는 1년 전보다 38% 상승했다”고 말했다.
심지어 실질임금은 2022년 4.5%, 작년 5.8% 상승한 데 이어 올해 남은 기간 최대 3.5% 추가로 상승할 것으로 예측된다. 실질 가처분소득도 3%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FT는 “이러한 폭발적인 임금 상승이 러시아 경제 전반에서 나타나 블루칼라 근로자의 삶을 극적으로 변화시켰다”고 평가했다.
실제 러시아 통계청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가운데 13% 이상이 재정 상황을 “좋다”고 답했다. 이는 1999년 조사가 시작된 이래 최고 수치다. “나쁘다” 또는 “매우 나쁘다”는 응답은 역대 최저인 14%, 1%를 각각 기록했다.
정부가 부유층의 자본을 통제하면서 자본 유출도 둔화한 것도 낙수효과를 일으켜 경기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중산층의 여가활동 지출 및 주택담보대출 수요가 크게 늘었으며, 테이크어웨이 커피 소비가 역대 최고 수준으로 높아졌다. 국내 관광도 번창하고 있다.
소매업체들도 대응에 나서고 있다. 러시아 KFC 후속업체인 로스틱스(Rostic’s)는 올해 100개의 신규 매장을 오픈할 계획이다. 모스크바의 투자자이자 기업가인 세르게이 이슈코프는 “상류층과 중산층 모두 정말 좋은 삶을 즐기고 있다”며 “신규 레스토랑이 속속 생기고 있고 러시아 전자상거래 시장에도 붐이 일고 있다”고 말했다.
| 러시아 시민들이 23일(현지시간) 모스크바 크렘린궁 앞을 걸어가고 있는 모습. (사진=AF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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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소비지츨 급증으로 경기가 과열되고 있다는 경고가 제기된다. 러시아의 근원 인플레이션은 8.7%에 달하며, 이에 대응하기 위해 러시아 중앙은행은 지난해 12월 이후 기준금리를 16%로 유지하고 있다. 전쟁 전 9.5%였던 금리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한때 20%까지 상승한 바 있다.
전쟁으로 정부의 재정적자가 확대하는 상황에서 경제 성장이 정부 지출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꼽혔다. 현재 정부가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0~70%에 달한다. 국방 예산 지출은 우크라이나 침공 전 23%에서 현재 40%로 급증했다.
이에 일부 경제학자들은 올 가을 러시아 경제 성장이 둔화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핀란드 은행 신흥경제연구소 소장인 이카 코르호넨은 “숫자만 보면 러시아 거시경제는 완전한 불균형 상태”라며 “이는 다른 경제 부문에 대한 대규모 소비지출 붐의 파급 효과를 보여준다. 실제로 그들은 지금까지 인플레이션을 낮추지 못해 중앙은행의 걱정이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