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는 자와 같이 울고 웃는 자와 같이 웃는 사람이 되련다’

by이순용 기자
2022.09.20 13:40:47

외과의사 박세업, 마흔에 다짐한 의료봉사 예순까지 이어와

[이데일리 이순용 기자] ◇아들의 결혼식 대신 모로코 현지인들의 곁에 남아있었다고 들었는데.

- 이번 코로나19 때 모로코하고 한국을 오가는 특별기가 네 번 떴었다. 그때 아들 결혼식도 있었는데 마음이 많이 힘들었다. 아내와 의논하면서 ‘우리가 지금 특별기를 타고 나갈 수 있고, 결혼식에도 참석해야 되지만 어려울 때 이곳에 있으면 모로코 사람들한테 힘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아들 결혼식 참석을 포기하고 현지인들과 직원들에게 “우리는 귀국하지 않고 여기 남아 있겠다” 라는 이야기를 하니까 엄청 좋아하더라. 가능하면 이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어려울 때에 같이 있으면서 돕고 싶은 마음이 많이 있었다.

◇ 해외 의료 봉사에 눈을 뜨게 된 계기는?

- 부산의대 재학하던 1980년 중반, 의료선교사에 대해 알게 되면서 의료선교로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 봉사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본격적인 계기는 부산침례병원(현재는 폐업)에서 인턴으로 수련 받던 때, 이라크 쿠르드 난민 이야기를 들은 다음부터다. 그때 의료봉사를 가고 싶어 지원했지만 당시엔 군 미필자는 해외를 가기가 어려워 가지 못했다.

당시 우리나라도 결핵환자들이 의료보험이 안 돼 입원을 못하고 고생하는 걸 많이 보면서, 동료들과 급여 일부를 모아 병원비를 내주기도 했지만 기회가 되면 외국에 나가서, 의료행위를 통해 결핵 등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우선 군대를 다 마쳐야 외국에 나갈 수 있으니 군대 문제를 해결한 35살, 95~96년도부터 조금씩 해외에 나갈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 해외 의료봉사를 다니며 인생을 바꿨던 한 사람이 있다면

- 98년도에 경남 마산에 개인병원을 개원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해외 의료소외지역을 찾았다. 베트남 구순구개열 수술 지원을 시작으로 중국, 몽골, 아제르바이잔 난민촌 등을 5년간 7차례 방문했다. 아제르바이잔에 있는 아르메니아 난민촌에서 만난 한 청년이 내 인생을 바꿨다.

◇ “이제 오면 어떡하냐. 전쟁 나고 어려울 때는 오지도 않다가 지금 다들 난민이 된 다음에야 와서

- 약주며 이렇게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라며 나를 보고 울부짖으며 분노하고 절규하는 청년을 보면서, ‘이 사람들이 어렵고 힘들 때 내가 옆에 같이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아주 강하게 들었다.

그 청년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어느 곳에 있던지 그곳에 있는 공동체 안에서 이렇게 같이 울고 같이 웃는 의료인의 역할을 하고 싶다’ 는 생각을 했다.

그런 중에 아프가니스탄의 전쟁이 있고, 의사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는 워낙 준비가 안 돼 바로 출발하지 못했지만 그때,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지 고민하게 됐고 헌신하는 삶을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가 2002년 즈음, 내 나이 마흔 때었다.

◇ 해외의료봉사활동을 준비했던 과정은?

- 2002년쯤 해외의료봉사를 하며 살겠다고 결심하고 나서, 개인병원을 처분하고 해외의료봉사활동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며 준비를 시작했다.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계획이 있어야 현지의 열악한 의료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이듬해인 2003년 호주에서 영어, 문화인류학, NGO학 관련 과정을 2년 동안 공부했다. 2005년쯤 해외의료봉사활동에 대한 준비가 끝나갈 무렵, 아프가니스탄에 전쟁으로 인해 의사나 의료시설이 없다는 얘기를 듣고 가족들과 함께 아프가니스탄으로 향했다.



◇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활동은?

- 아프가니스탄에서는 2005년부터 수도 카불의 큐어 국제병원에서 일반외과 과장, 가정의학과 교육부장으로 일했다. 2007년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인 2명이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해 한국의 NGO와 파병부대까지 철수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바그람 미군부대 안에 있는 바그람 한국병원에서 계속 일할 의사가 필요했다. 한국 외교부의 제안으로 수도 카불 인근 바그람 한국병원의 병원장을 맡았고, 병원장 부임 이후 트레이닝 병원으로 바꿔서 현지 의사 등 훈련에 힘쓰며 의료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 아프가니스탄 가정폭력 피해자, 존스홉킨스로 떠난 계기가 되었다고?

- 아프가니스탄에는 가정폭력 문제로 여자들이 목숨을 끊으려 할 때 바늘을 삼킨다. 바늘을 삼킨 환자를 치료해서 살려놓고 집으로 보내면 또 남편에게 맞아 병원으로 오는 모습을 봤다. 그때부터 병원 밖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병원 안에서 외과의사로 일을 하는 게 내 할 일의 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개발국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좀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그들이 사는 현장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음을 절감했다.

이런 마음과 생각이 ‘보건’과 연결된다는 말을 듣고, 50세에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에서 보건학 공부를 시작하며 지역주민의 건강향상을 폭넓게 도모하는 공중보건을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아프리카에 결핵환자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된 것도 이 시기였다.

◇ 존스홉킨스 석사를 마치고 모로코를 선택한 이유

- 2012년 보건학 석사 공부를 마치고 다시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현지 상황이 악화되어 외국인의 입국이 어렵게 됐다. 그래서 의료봉사자도 없고 NGO 활동이 부족한 북아프리카에 관심을 갖고 모로코를 통해서 모리타니아, 말리 쪽으로 진출하겠다는 계획으로 거점 국가로 모로코를 선택했다.

모로코는 빈부격차가 심하고 의료 환경이 열악해 결핵 발병률이 매우 높은 지역이다. 또한 아프리카인들이 유럽으로 건너가기 위한 길목에 위치해 있어 밀입국자들이 몰려들었고, 1개 주택에 3~4가구가 함께 생활하는 등 열악한 주거환경으로 인해 결핵 감염률이 높아 무엇보다 보건사업이 필요한 나라였다.

◇ 모로코의 결핵 퇴치를 위해 고안한 스마트 약상자는 어떻게 나오게 됐는가?

- 우리가 결핵 환자를 치료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약을 먹는 것인데, 나는 약을 먹이는 것보다는 ‘이 사람들이 왜 약을 잘 안 먹을까’ 라는 데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국내 헬스케어 업체와 함께 스마트 약상자를 고안했다. 약의 무게를 감지해 결핵약 복약여부를 확인하고, 알람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려 환자의 복약을 돕고 있다. 복용하지 않으면 결핵전담 보건요원이 전화나 방문교육을 실시한다. 기존 결핵환자의 완치 비율은 70%에 그쳤으나, 스마트 약상자를 건네받은 환자들은 6개월간 꾸준히 약을 복용해 완치율이 90%에 이른다.

◇ 마지막 꿈이 있다면?

- ‘우는 자와 같이 울고 웃는 자와 같이 웃는 사람이 돼야 한다’ 는 것이 나의 꿈이다. 의사로 있든 청소부로 일을 하든 그곳에서 나이가 들어서 일을 하지 못하든 상관없이 그곳에 있는 사람들과 같이 웃고 같이 울 수 있다면 충분하다. 최종 목표는 북아프리카에서 일하고 있는 동안, 그 국가의 의료 시스템이 조금 더 합리적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