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수의 월가 키워드)Investment Bank②
by정명수 기자
2004.03.25 14:50:24
[뉴욕=edaily 정명수특파원] "월가의 투자은행(Investment Bank)"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 바로 `돈`이다. 아이비 리그 출신의 우수한 인재들이 투자은행으로 향하는 이유는 그곳에 엄청난 부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2월부터 3월 투자은행들의 실적이 발표될 즈음, 월가에서는 "어느 회사의 누가 어디로 옮긴다"는 식의 얘기를 흔히 들을 수 있다.
모든 비즈니스가 그렇지만 금융은 기본적으로 `사람 장사`다. 뛰어난 인재를 많이 끌어들이면 업계 최강이 된다. 인재를 확보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수단은 역시 `돈`이다.
◇인재들의 대이동
비용절감을 위해 인력 구조조정을 단행하던 IB들이 스카웃 열풍에 휘말렸다. M&A, 채권, 기술주 분석 등 자신들이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분야에서 최고라는 인재들을 끌어들이느라 혈안이다.
인재 전쟁의 한복판에 CSFB가 있다. 지난 2월 도이체방크는 CSFB로부터 10여명의 인력을 `차떼기`로 스카웃한다고 발표했다.
그 중에는 존 메츠라는 기술주 분석의 대가도 포함돼 있다. 메츠는 도이체로부터 3년간 최소 500만달러의 연봉을 제의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엄청난 몸값의 메츠는 그러나 이달초 CSFB에 잔류키로 최종 결정됐다. CSFB의 존 맥 CEO가 그에게 어떤 제안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가만히 앉아서 도이체에 당할 수는 없었다. 지난해 CSFB는 기술주 관련 세일즈에서 업계 3위를 기록했다. 도이체방크는 이 분야 13위다. 도이체가 메츠를 끌어왔다면 순위에 지각 변동이 일어났을 것이다.
CSFB의 인재를 노리는 IB는 도이체뿐이 아니다. 베어스턴스는 지난 금요일 CSFB의 신용파생상품 트레이딩 헤드인 데이비드 칼손을 스카웃했다고 발표했다.
UBS도 지난 월요일 M&A 사업부문 헤드에 CSFB 출신의 캐리 코치만을 선임한다고 밝혔다. 코치만은 CSFB에서 M&A 공동 헤드로 일해왔다. 39세인 코치만은 4월부터 시카고에서 투자은행 부문의 공동 헤드도 겸직할 예정이다.
CSFB는 다급해졌다. 회사를 떠나기로 결정된 사람들을 붙잡는 한편 새로운 인재를 외부에서 끌어오지 않으면 안됐다.
CSFB는 정크본드 투자의 일인자라는 베넷 굿맨을 다시 눌러 앉혔다. 베넷 굿맨을 위해 CSFB는 `Alternative Capital Division`이라는 새로운 사업부를 만들기까지 했다. 굿맨은 지난해 가을 CSFB를 떠나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내로라하는 펀드와 투자은행에서 그를 모셔가려고 삼고초려를 마다하지 않았다.
굿맨은 정크본드, 프라이빗 뱅킹 분야에서 최고 솜씨를 자랑한다. 올해 46세인 굿맨은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출신으로 정크본드의 본산, 드렉셀번함에서 실력을 쌓았다. 이후 도날드슨, 러프킨 앤 젠렛(DLJ)이라는 레버리지 파이낸싱 그룹을 이끌며 정크본드 업계의 1인자가 됐다. DLJ가 2000년 11월 CSFB로 합병되면서 CSFB 그룹의 일원이 됐다.
2003년 4월 그는 CSFB 상업은행 부문 회장으로 승진했지만, 그로부터 4개월 후 회사를 떠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존 맥 CEO는 래리 슐러스가 굿맨의 후임자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런데 이달초 슐러스가 돌연 회사를 떠나면서 상황이 묘하게 돌아갔다. 도이체, 베어스턴스, UBS 등 경쟁사에서 인력을 빼가는 통에 정신이 없던 CSFB는 다시 굿맨을 잡아두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굿맨의 연봉은 얼마나 될까. 로이터 통신은 최근 그의 연봉 패키지가 1000만달러를 넘는다고 보도했다.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굿맨의 잔류는 CSFB에게 낭보임에 틀림없다. 지난 3년간 CSFB는 굿맨이 지휘하는 레버리지 파이낸싱 분야에서 `넘버 원`이었다. 지난해 하이일드 언더라이팅도 220억달러에 달해 2002년도 실적을 두배나 뛰어넘었다. 굿맨은 하이일드 채권 분야에서 CSFB에 엄청난 수익을 안겨줬다. 그는 한때 월가에 유행처럼 번졌던 `텔레콤 본드` 투자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당시 월가는 굿맨의 전략을 조롱했지만, 결국 CSFB만이 통신채권에 물리지 않은 유일한 IB가 됐다.
CSFB에게는 굿맨 같은 인물이 회사를 떠나 다른 경쟁사로 옮긴다는 것 자체가 악몽이었을 것이다.
◇왜 CSFB인가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CSFB의 고급인력들이 스카웃 표적이 된 것일까.
도이체방크가 `차떼기` 스카웃을 시도했던 기술주 분석 부문의 사정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CSFB는 한 때 `기술주의 왕국`으로 불렸다. 프랭크 콰트론이라는 `문제적 인물`이 CSFB에 들어오면서 90년대말 IT 버블기에 실리콘 밸리를 장악하다시피했다.
도이체가 노렸던 인력들도 모두 콰트론 인맥이다. 콰트론파는 그러나 IT 버블 붕괴와 콰트론 개인의 몰락으로 사내 입지가 급격하게 위축됐다. 존 맥 CEO는 기술주 분석팀 인력을 300명선에서 100여명선으로 축소시켰다. 연봉이 깎이고, 각종 혜택이 없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틈을 도이체가 비집고 들어간 것이다. 최근 주식시장이 회복세를 나타내고, 기술주 중심으로 M&A 시장이 활성화될 조짐을 보이자, 도이체가 인력 충원에 나선 것이다.
도이체는 `콰트론파` 10여명을 통째로 데려오는데 개인 당 최소 300만~400만달러의 연봉을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말한 메츠는 이보다도 많은 연봉을 제안받았다.
CSFB는 `콰트론 스캔들` 이후 고급 인력에 대한 연봉 및 보상 체계에 변혁을 꾀하고 있다. 존 맥 CEO가 주도적으로 고액 연봉에 제동을 걸고 나선 것. 이로인해 몸값 불리기에 익숙한 CSFB의 우수 인재들이 집중적으로 스카웃 유혹을 받게 된 것이다.
CSFB는 M&A 부문에서 3위권을 항상 유지했지만, 최근 2년간 주요 인력이 이탈하면서 지난해에는 순위가 6위로 추락했다. 월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디즈니-컴캐스트 M&A와 같은 `빅딜`에서 CSFB는 철저하게 소외 당했다.
존 맥 CEO는 잃어버린 M&A 시장을 되찾기 위해 마크 그라네츠를 영입, 글로벌 M&A 헤드로 앉히는 등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그라네츠는 지난해 GE와 비방디유니버셜의 방송미디어 부문 합작, 1999년 쉐브론과 텍사코 합병 등 굵직한 M&A를 성사시킨 베테랑이다.
여기서 의문이 든다. CSFB도 필요한 인력을 스카웃하면서 거액을 쓰지 않는가. 다른 IB로 옮기려는 인재를 돈으로 붙잡으면 될 일이 아닌가.
존 맥 CEO의 생각은 좀 다르다. 그는 월가의 보상체계 전반을 개혁해야한다고 믿고 있다. 존 맥은 IB하면 떠오르는 `돈`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 계기가 바로 `콰트론 스캔들`이었다.
◇프랭크 콰트론
CSFB는 지난해 초 프랭크 콰트론을 해고했다. 다음 달 콰트론은 기술주 IPO와 관련된 비리 협의로 두번째 법정에 설 예정이다. 콰트론 스캔들은 그가 기술주 IPO를 추진하면서 애널리스트들에게 해당 회사의 사업내용을 미화하도록 압력을 가했다는 것과 주식 배당을 특정 고객들에게 유리하게 조작했다는 것이다. 작년에 열린 재판에서는 배심원들의 판단이 일치하지 않아 공판 자체가 무효가 됐다.
콰트론 스캔들은 기술주 거품 시대 월가의 치부를 그대로 보여준다. 존 맥은 CSFB가 콰트론 식의 비리로 휘청거리기 시작한 2001년 7월 CEO로 선임됐다.
필연적으로 존 맥은 콰트론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었다. 콰트론은 CSFB 내에 스스로의 왕국을 가지고 있었다. 존 맥은 콰트론이 가진 무소불위의 힘이 스캔들을 만들었고, 회사의 수익성을 떨어뜨린다고 판단했다.
존 맥이 CEO가 된지 3개월후 그는 콰트론과 담판을 하게 된다. 당시 콰트론은 자신의 기술주 사업부문에서 발생하는 매출의 15%를 인센티브로 받아가는 파격적인 계약을 맺은 상태였다. 콰트론은 자신이 원하는 팀원을 언제든지 고용하고 해고할 수 있었다.
콰트론은 실리콘 밸리 공략을 위해 CSFB의 본사가 있는 뉴욕에서 떨어져 나와 캘리포니아 팔로 알토에 별도의 근거지를 만들기도 했다.
존 맥과 콰트론의 담판은 뉴욕과 팔로 알토의 중간 지대인 캔자스 시티에서 이뤄졌다. CSFB의 최고 책임자인 존 맥조차도 콰트론을 뉴욕으로 불러들이지 못한 것이다.
존 맥과 콰트론은 만남이 처음은 아니었다. 사실은 둘 사이에는 깊은 악연이 있다. 존 맥은 CSFB의 CEO가 되기 전에 30여년간 모건스탠리에서 일했다. 그는 2001년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후 곧바로 CSFB로 옮겨왔다. 존 맥이 모건스탠리 사장으로 있을 때 콰트론을 부하로 거느리고 있었다.
기술주 부흥이 태동하던 1996년 콰트론은 존 맥에게 파격적인 인센티브와 독자적인 권한을 요구했다. 콰트론은 기술주 팀을 업계의 최강으로 만들어 놓을 테니 그에 합당하는 돈과 힘을 달라고 했다.
존 맥은 콰트론의 제의를 거절했다. 콰트론은 자신이 키운 존 메츠 등 기술팀 150여명을 몽땅 이끌고 도이체방크로 이적해버린다. 존 맥을 궁지로 몰아넣은 것이다.
이후 콰트론은 도이체에서 승승장구했고, 몸값을 더욱 높여서 팀을 이끌고 CSFB로 넘어왔다. IT 열풍이 전세계를 열광시킬 때 콰트론의 기술주 팀은 월가 최고의 실적을 자랑했다. CSFB 내에서는 그 누구도 콰트론파를 제어할 수 없었다.
존 맥이 CSFB로 왔을 때, 콰트론과 같은 폐쇄적이고, 터무니없는 인센티브를 보장받은 독자적인 팀들이 사내에 무수히 존재했다. 존 맥은 증권거래위원회(SEC) 출신 율사를 고용, 법무 감사팀을 만들었고, IT 버블 붕괴로 불거진 각종 스캔들을 내사하도록 했다. 존 맥은 콰트론을 블랙리스트 1번에 올려놨다.
그러나 법무팀은 콰트론을 합법적으로 제거할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오히려 콰트론과 CSFB가 맺은 계약서에는 회사가 일방적으로 콰트론을 해고했을 때 막대한 보상금을 지불하도록 돼 있었다.
존 맥은 다른 작전을 써야만했다.
캔자스시티에서 만난 두 사람은 어색한 저녁을 함께했다. 존 맥은 이렇게 말했다.
"프랭크, 난 계약서를 찢어버릴 거야."
"회장님, 그렇게는 못하실걸요. 계약은 계약이니까요."
"난 할 수 있다네. 법률적인 검토도 했어. 법정에 갈 준비도 돼 있다구.
두 사람 사이에 냉기류가 흘렀다. 존 맥은 모건스탠리에 있을 때 `Mack the Knife`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부하 직원들을 무섭게 몰아부치는 것으로 유명했다. 맥이 칼을 뽑았다면 정말 콰트론의 목을 칠 것이다.
콰트론은 맥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의 연봉이 깎였고, 권한도 축소됐다. 콰트론의 역할도 바뀌었다. `자신의 팀`만 이끄는 것이 아니라 이사회의 일원으로서 근무시간의 20%를 할당, 다른 팀을 의무적으로 도와야했다.
존 맥과 콰트론의 과거를 아는 사람들은 존 맥이 CSFB에 가자마자 콰트론을 내칠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존 맥은 콰트론을 그대로 두고, 자신이 추진하는 개혁의 모델로 콰트론을 내세웠다.
존 맥은 "콰트론조차 항복했다. 너는 어떻게 할래"하며 다른 팀들의 인센티브도 깎아버렸다. 존 맥은 자기 자신, 자신의 팀의 이익을 위해 모래알처럼 흩어진 CSFB를 `하나의 팀`이라는 개념으로 묶어나가기 시작했다. 존 맥의 개혁이 시작된 것이다.
◇존 맥의 개혁
존 맥은 올해 60세로 1972년 모건스탠리에 입사했다. 2001년 권력 투쟁에서 밀려날 때까지 채권 부문을 이끌며 모건스탠리를 월가 최고의 IB로 키워냈다. 그는 레바논 이민자 집안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축구 장학금을 받고 듀크 대학에 입학했으며, 졸업후 노스캐롤라이나의 작은 브로커리지 회사에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스미스바니에서 채권 세일즈맨으로 일했고, 모건스탠리에 입사한 후 특유의 카리스마를 발휘, 사장직에 올랐다.
사람들은 그가 모건스탠리를 그만두자 마자 CSFB의 CEO를 맡은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비록 모건스탠리에서 밀려났지만, 여생을 편하게 보낼 수 있는 충분한 물질적 보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퇴직 당시 그는 5억4400만달러에 달하는 스톡옵션을 부여받았다.
월가는 그가 문제 투성이 CSFB에 가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존 맥이 와서 본 CSFB는 그야말로 흥청망청이었다. 일례로 CSFB는 매년 1000만달러의 자금을 들여서 벤츠와 BMW를 임대, 500여명의 매니징 디렉터들에게 제공했다. DLJ를 합병할 때 이같은 조건이 계약서에 명기돼 있었던 것이다.
존 맥은 자신이 젊음을 바친 월가가 이처럼 비효율적이고, 무분별해지는 것을 묵과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존 맥은 지난해 11월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서 월가의 개혁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소상하게 밝혔다. 그는 이날 `인력 관리`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존 맥은 "요구는 반드시 관리되어야만 한다"고 말했다.
월가는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람들을 끌어들였고, 그에 걸맞는 파격적인 보상을 제공함으로써 성장해왔다. 월스트리트 맨들의 요구는 간단한 것이다. 바로 `돈`이다. 존 맥은 돈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업을 경쟁력있게 만드는 것은 `돈`이 아니다.
"맞아요. 월가에 들어오면 많은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직장을 잡을 때 오직 돈에만 초점을 맞춰서는 안됩니다. 돈에 집착하면 궁극적으로 회사에 피해를 주게 됩니다. 제 생각에 월가는 사람을 관리하는 능력이 매우 약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하죠. `만약 당신이 우리와 함께 일하면 당신이 원하는 분야에 배치시켜주겠다. 그리고 많은 돈을 주겠다` 이것이 바로 `머니 컬쳐(money culture)에요.
돈이 매니지먼트를 대체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내가 돈을 많이 줬으니까, 너와 논쟁을 벌일 필요는 없다. 너를 지도할 필요도 없다. 너를 진실하게 대할 필요도 없다. 너를 코치할 필요도 없다. 이런 것이 오늘날 월가의 문제를 만들어낸 겁니다."(But too often in our business, money is used as a substitute for managing. So the idea that if I can pay you a lot of money, [then] I don"t have to engage with you, I don"t have to be direct with you, I don"t have to be honest with you, I don"t have to coach you, [has] made a whole problem on Wall Street.")
존 맥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최고라고 믿는 곳에서 일하고 싶어한다"며 "회사로부터 정직한 피드백을 받고자 한다"고 말했다. 그는 돈이 아니라 매니지먼트로 사람을 사로잡아야한다고 강조한다.
"만약 어떤 직원이 아이디어가 있다면 회사는 핵심적인 지원과 자본을 제공해서 그것을 현실화하도록 해줘야합니다. 매니저는 직원들을 존엄하게 대하고, 그들의 활동에 대해 보답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회사의 전체적인 문화에 동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자신의 부하 직원이 될지도 모를 하버드대생 앞에서 존 맥은 다소 고루한, `오소독스`한 인력 관리론을 설파했다.
월가는 "더 많은 인센티브, 더 많은 연봉이라면 언제든지 회사를 바꿀 수 있다"는, `돈의 문화`에 젖어있다. 존 맥 자신도 그런 월가의 문화를 만든 장본인 중 하나다.
존 맥은 CEO 취임 당시 "돈 때문에 CSFB에 온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돈의 힘`으로 굴러가는 월가를 `인간의 힘`으로 굴러가도록 개혁할 수 있을까. 존 맥이 오늘날 Investment Bank에 던지는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