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피고도, 검찰도 지친 `한화사건 2차전`

by안재만 기자
2012.03.22 17:35:45

[이데일리 안재만 기자] 한창 문서 작업 중인데 갑자기 컴퓨터가 다운된 경험, 누구나 한번 정도는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분노와 억울함이 치솟다가 뒤이어 허무함이 찾아 온다. 막막하고 힘이 빠지는 순간이다. 애써온 것이 무산될 때면 늘 그렇다. 한화 비자금 공판이 딱 이랬다.

예정대로라면 한화 사건은 벌써 선고가 됐어야 한다. 검찰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에 횡령 및 배임 혐의로 징역 9년, 벌금 1500억원을 구형한 상태. 원래대로라면 선고 공판은 지난달 23일 열려야 했다. 그런데 인사 이동이 문제가 됐다. 사건을 담당하던 서울서부지방법원의 한병의 부장판사가 27일 인천지법으로 옮기게 되면서 사건이 모두 `초기화`됐다.

한번 했던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니, 22일 열린 `첫` 공판에서는 여러번 김 빠진 듯한 분위기가 감지됐다.

일단 재판부가 미안해(?) 하는 모습이었다.

서경환 부장판사는 "형사법상 재판부가 바뀌면 다시 시작하도록 돼 있는데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하다"면서 "2주일에 한번씩 빽빽하게 공판을 진행해 7월에는 사건을 마무리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서 판사는 또 "피고인 심문을 처음부터 다 시작하려면 감당하기 어렵다", "어떻게 해야 재판을 빨리 진행할 수 있을 지 생각해봤다"는 등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김 회장의 불출석도 가라앉은 분위기에 한몫했다. 한화에 따르면 김 회장은 지난 19일부터 서울대학병원에 입원 중이다. 회사 관계자는 "원래부터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의사의 권유로 입원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러자 검찰측에서는 김 회장을 제외한 나머지 피고인 15명에 대한 공소 사실만 진술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핵심 인물에 대한 진술이 없다보니 맥이 풀렸다. 주로 홍동옥 여천NCC 사장에 대해 언급됐다.

한화 사건은 공소장만 100페이지에 달하고, 기록이 5만페이지로 상당한 분량이다. 피고인만 16명이다보니 증인으로 출석한 한화 인사만 30명 정도다. 오죽하면 "서부지법에 가지 않은 한화 임원은 핵심에서 벗어나 있는 인물", "법원에 안불려간 임원은 자존심 상해하더라"는 농담이 한화에 떠돌고 있다.

변론 재개에 대해 검찰, 한화 모두 불만족스러운 분위기다. 검찰은 "1년이상 끌어온 사건을 다시 시작하는 건 낭비"라는 입장이다. 실제로 검찰측에서는 `다른 안건도 바쁜데 변론에 시간을 쏟아부어야 하는 것이 아깝다`는 투덜거림이 흘러나온다는 전언이다.

한화 역시 "회장을 비롯한 임직원이 수시로 법원에 불려가니 경영에 차질이 생긴다"고 지적했다.

22일 공판은 양측의 모두진술만으로 끝났고, 쟁점에 대한 갑론을박은 없었다. 그런데 모두진술에만 3시간 이상이 걸렸다(모두진술 이후엔 별건에 대한 심문이 이어졌다).

이날 한 피고인은 투병 생활 중에 재판장에 왔다고 한다. 다시 시작된 공판에 피해를 보는 이가 한둘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