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를 사는 '동대문 쪽방촌', 시간이 멈춘 이유

by장종원 기자
2013.03.20 16:19:51

[이데일리 장종원 기자] “이렇게 높은 분들이 많이 왔다 갔는데도 쪽방촌은 여전히 그대로라는 게 신기하네요.”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이 서울 동대문 쪽방촌을 방문했던 지난 19일 오후 골목길에 나와 구경을 하던 한 주민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동대문 쪽방촌은 서울 도심이라는 지리적 특성에다 긴 역사로 인해 유명 정치인이나 기업체의 단골방문 코스로 자리 잡은지 오래다. 최근에도 김황식 전 국무총리나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였던 문재인 의원 등이 이곳을 다녀갔다.

선거철이나 겨울철이면 많은 정치인과 기업이 이곳을 찾아 주민을 위로하고 후원의 손길을 내밀었지만, 변한 것은 별로 없다. 빈곤문제 해결과 복지정책 확대를 외치는 정치인들이 많아도 우리 사회의 양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이 동대문 쪽방촌 담벼락에 그려 넣은 40년전 산아 제한 포스터.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방치된 쪽방촌의 현재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하다.
극화는 더 심각해지는 이유와 같다.

서울 종로구 창신동 430번지~464번지에 걸쳐 있는 동대문 쪽방촌은 동대문역과 동묘역 사이 골목길에 들어서 있다. 3.3㎡(1평) 남짓한 방 479개가 다닥다닥 붙어있다. 흡사 벌집같은 이곳에 328명이 산다. 과거 사창가로 유명했던 이 지역은 1970년대 동대문 터미널이 이전하고 평화시장 등 복합상가가 들어서면서 쪽방촌으로 변모했다.

당시 1인당 국민 소득 1000달러를 외치던 대한민국은 이제 2만불을 넘는 나라로 성장했지만 이곳만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 벽화프로젝트 사업의 일환으로 학생들이 그려넣은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40년전 포스터가 이곳의 현재 모습을 보여주는 듯 했다.

가난의 그림자는 쪽방촌을 좀처럼 떠나지 않는다. 일용직이거나 무직인 이들에게 15만~25만원에 이르는 월세는 버겁기만 하다. 쪽방상담센터가 운영하는 대출프로그램은 10만원을 빌려주고 6개월에 걸쳐 상환하는 조건이다. 하룻밤 술값, 갓 만남을 시작한 연인의 고급레스토랑 식사비용이다.



쪽방촌 주민들은 평생을 성실히 살았지만 사업 실패나 불의의 사고 등으로 인해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이 ‘제2의 인생’으로 거듭나기엔 여전히 우리 사회안전망은 빈약하다. 누구든 쪽방촌 주민이 될 수 있다.

고관절을 다쳐 거동이 불편한 할아버지와 정신이 온전치 못한 아들을 혼자 부양하는 김숙자(가명·64)씨는 “사업에 실패하고 남편이 사고까지 당해 결국 이곳으로 왔다”면서“폐지 수집으로 생활하고 있는데 월세 44만원을 내는 것도 벅차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씨는 정부의 기초생활수급 대상이 아니다. 300명이 넘는 쪽방촌 주민 중 기초생활수급자는 예상과는 다르게 100명이 조금 넘는 30%대에 그친다.

고령층이 많은 이곳 주민의 특성상 의료비 역시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김나나 동대문 쪽방센터 소장은 “예전에는 건강보험공단에서 쪽방촌 주민에게 가장 낮은 보험료만 내도록 배려해 줬지만 담당자가 계속 바뀌면서 혜택이 없어져 버렸다”고 말했다.

유난히 추웠던 올해 겨울을 간신히 버틴 쪽방촌 주민은 보릿고개를 대비하고 있다. 매년 겨울과 연말, 시즌처럼 찾아오는 후원의 손길이 뚝 끊어지는 시기가 온 것이다.

그러나 쪽방촌 주민들은 이곳이 최악이 아니라고 한다. 형편이 조금 나아져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갔던 사람이 이곳을 잊지 못해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가난하지만 서로를 의지하는 공동체가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곳에선 고독사를 찾아보기 힘들다.

김상조(가명·66)씨는 “동네사람이 아프면 서로 119에 연락해주고 입원 보증도 서준다“면서 ”우리는 비록 돈은 없지만 이웃 간의 정은 남아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