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선발인원 줄이려고?"…순경공채 문제유출에 수험생은 운다
by이용성 기자
2020.09.22 11:00:07
지난 19일 순경 필기시험서 시험 문제 유출
일부 시험장에선 마킹할 시간 1~2분도 주어져
수험생 "국가 차원의 시험이 너무 허술" 지적
[이데일리 이용성 기자] “독서실에 있는 책을 다 뺐습니다. 곧 추석이어서 부모님도 뵐 겸 내려가 보려고요”
지난 19일 ‘2020년 제2차 순경공채 및 경찰행정학과 경력 채용 필기시험’이 치러 뒤 서울 동작구 노량진에서 만난 상당수 경찰공무원 지망생들의 허탈함과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전국에서 5만여명이나 응시한 이 시험의 일부 고사장에서 시험 문제가 사전에 유출됐기 때문이다.
| 지난 19일 오전 서울 시내 한 학교에 마련된 순경 공채 필기시험장에서 응시생들이 고사장을 확인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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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정황은 이렇다. 이 시험 선택과목인 ‘경찰학개론’ 9번 문제가 잘못 출제됐는데, 일부 고사장에서 시험 시작 전에 정정된 문제가 미리 공지된 것. 먼저 정정된 문제를 본 수험생들이 해당 내용을 사진으로 찍어 공유하면서 유출된 것이다. 경찰에 따르면 해당 내용을 일찍 공지한 곳은 경기남부, 경남 등 2684개 교실 중 25개 교실로 확인됐다.
다음날 경찰은 문제 유출로 피해를 본 응시생은 별도 점수 산정 절차를 거쳐 추가 합격시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논란이 된 9번 문제가 내용상 출제 오류는 없기 때문에 정답을 ④번으로 확정해 채점하고 기존에 공고된 지방청별 선발 예정 인원에 따라 합격자를 선발한다. 이와 별도로 9번 문제로 탈락할 수 있는 응시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모든 필기시험 불합격자에게 1문제 해당하는 점수를 부여한다. 이들의 합산 점수가 ‘필기 합격자(A그룹)’의 커트라인 이상일 경우 ‘추가 필기 합격자(B그룹)’로 선발한다는 것.
하지만 수험생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서울 노량진에서 2년간 경찰공무원 시험에 매달린 김모(29)씨는 “부모님과 상의해보고 다시 공부를 시작할지 말지 결정할 것”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김씨는 “국가 공무원을 뽑는 시험이 이렇게 허술할지 몰랐다”며 “뉴스를 통해 구제책을 봤는데 수험생에게 직접 안내하고 사과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언급했다. 이어 “최종 합격자수가 늘면 내년 채용 인원이 줄어들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덧붙였다.
| 19일 전국 94곳에서 치러진 순경 공채 시험에서 한 선택과목 문제가 사전에 유출됐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사진=경찰공무원 관련 커뮤니티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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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에서 만난 수험생 A씨는 “뉴스에 나온 구제책이 그나마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일 것 같다”라며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애초에 이런 구설수에 오른 것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일부 시험장에서 시험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려도 감독관이 1~2분 정도 추가 시간을 제공해 수험생이 답안지 ‘마킹’을 계속했다는 의혹도 불거져 나왔다. 이에 대해 A씨는 “종이 울리면 펜에서 손을 떼야 하는데 계속 마킹하는 수험생들이 더러 있었다”며 “원칙적으로는 무효처리 해야 하지만, 봐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강조했다.
곧 있을 체력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수험생 박모(28)씨는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마킹 시간을 빼서 시험을 보는데, 다른 수험생들이 추가적으로 시간을 얻어 마킹하는 모습을 하면 억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경찰 간부시험을 준비하다 올해 처음 순경 시험에 도전한 김모(24)씨는 “매뉴얼에 시간별로, 상황별로 감독관들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딱딱 정해져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감독관들이 매뉴얼대로 했다면 이런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경찰은 21일 이번 시험에서 발생한 문제를 인정하고 사과했다. 김창룡 경찰청장은 “경찰의 관리 미숙으로 많은 수험생들께서 놀라시고 한 데 대해서 사과를 드린다”며 “내부 감찰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어 “최종 선발 인원이 조금 늘게 될 것”이라며 “수험생 여러분들께서 조치와 방침에 대해서 양해를 해주시면 감사하겠다”고 부연했다.
한편 최근 채용시험과 관련해 취준생이 겪은 ‘불공정’은 순경 공채뿐만이 아니다. 지난 13일 치러진 MBC 채용시험에서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문제를 제기한 당사자를 피해자라고 칭해야 하는가, 피해 호소인이라고 칭해야 하는가’라는 논술 문제를 두고 고소인에 대한 ‘2차 가해’라는 지적이 나오자 MBC 측은 다음 날인 14일 재시험을 결정했다.
MBC에 전달한 성명서를 작성한 응시생 B씨는 “시험일에 맞춰 생활하는 것이 취준생들”이라며 “문제에 대한 제대로 된 해명 없이 재시험을 결정하는 것은 기존 시험을 치른 응시생의 노력과 성과가 공채 시험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것은 불공정한 일”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