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한 암환자 기다리다 언성 높인 119대원…法 “경고 처분 취소”
by이재은 기자
2024.09.11 10:36:10
환자, 119에 전화해 “발열, 샤워 시간 달라”
상황실 근무자 “30분 뒤 구급차 도착 조치”
환자, 28분여 만에 1층 내려오기는 했지만
119대원 “이런 식으로 기다리게 하면 안 돼”
法 “방어권 보장 위한 의견진술 보장 없어”
[이데일리 이재은 기자] 샤워한 뒤 구급차에 타겠다고 한 암 환자를 이송하기 전 ‘이런 식으로 기다리게 하면 안 된다’고 언성을 높인 119대원에 대해 법원이 경고 처분을 취소하라고 명령했다.
인천지법 행정1-2부(부장판사 김원목)는 구급대원 A씨가 인천시장을 상대로 제기한 경고 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고 11일 밝혔다. 이와 함께 A씨에 대한 경고 처분을 취소하라고 인천시에 명령했다.
재판부는 “소방 공무원에 대한 경고 처분은 행정절차법의 적용을 받는다”며 “행정절차법에 따르면 행정청이 당사자의 권익을 제한하는 처분을 할 경우 의견 제출 기회를 줘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피고 측은 조사실에서 A씨에게 진술거부권과 변호인 조력을 받을 권리 등을 말로 설명했다고 주장하지만 방어권 보장을 위한 의견 진술 기회가 충분히 보장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이런 이유로 경고를 취소하기 때문에 해당 처분이 적절했는지는 추가로 판단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인천소방본부는 지난해 8월 8일 인천의 한 호텔에서 병원으로 이송된 환자 B씨가 “구급대원이 불친절했다”는 민원을 제기한 뒤 감찰 조사 과정을 거쳐 같은 달 28일 A씨에게 경고 처분을 내렸다.
A씨가 국가공무원 복무규정에 따라 항상 친절하고 신속·정확하게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데 개인감정을 다스리지 못했고 불필요한 민원이 제기돼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게 인천소방본부의 설명이었다.
당시 인천소방본부는 “이후 같은 사례가 없도록 각별히 유의하며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하라”면서도 “그간 쌓은 공적과 비위 정도를 고려해 (서면으로) 경고 처분을 한다”고 밝혔다.
A씨가 받은 ‘경고’ 처분은 소방 공무원에게 내려지는 징계(파면·해임·강등·정직·감봉·견책)는 아니지만 1년 동안 근무성적평정, 전보인사, 성과상여금 등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 조치다.
조사 결과 B씨는 민원 신고를 넣기 하루 전날인 지난해 8월 7일 오전 7시께 119에 전화를 걸어 “국외에 머물다 암 치료를 받기 위해 한국에 왔는데 지금 열이 많이 난다”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말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에 인천소방본부 상황실 근무자는 “병원 이송을 위해 구급차를 호텔로 보내주겠다”고 했지만 B씨는 “몸살감기로 사흘 동안 못 씻었는데 샤워할 시간을 좀 달라”고 요청했다.
상황실 근무자는 “30분 뒤 구급차가 호텔에 도착하게 해주겠다”고 전달했고 출동 지령을 받은 관할 안전센터 구급차는 22분 만에 호텔에 도착했다.
샤워한 B씨는 구급차가 도착하고 6분 뒤 객실에서 1층 로비로 내려왔지만 A씨는 B씨를 향해 “구급차를 이런 식으로 기다리게 하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후 B씨는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고 이튿날 A씨에 대한 민원을 제기했다.
이 같은 이유로 A씨가 경고 처분을 받은 사실이 공개되자 전국소방공무원노조 소방본부(노조)는 지난해 11월 인천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왜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구급대원이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통탄스럽다”며 “민원 해소를 위해 구급대원을 희생시킨 인천소방본부는 반성하고 처분을 철회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당시 노조는 A씨가 경고 처분을 받은 뒤에도 B씨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이유로 민원을 제기했다며 결혼식을 앞두고 있던 A씨는 민원에 정신적 충격을 받아 병원에 입원까지 해야 했다고 덧붙였다.
A씨는 이 같은 경고 처분에 불복해 인사혁신처 소청심사위원회에 소청 심사를 청구했지만 기각당했고 지난 2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A씨는 소송 과정에서 “경고 처분을 하면서 사전통지를 안 해 의견을 제출할 기회가 없었다”며 “방어권을 행사하는 데 지장을 받았기 때문에 행정절차법 위반”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당시 민원인에게 ‘다른 응급환자를 위한 출동이 늦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며 “그 과정에서 다소 언성을 높였다는 이유로 국가공무원 복무규정을 위반했다고 볼 수 없다”고 강조했다.
재판부가 A씨의 손을 들어준 상황에서 인천소방본부는 당사자가 지난 2월 다른 지역으로 전출한 것 등을 고려해 항소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인천소방본부 관계자는 “감찰 조사 결과 당시 신고자는 악성 민원인이 아니었고 30분 지연 출동도 상황실 근무자가 신고자에게 먼저 제안한 것”이라며 “절차가 잘못됐지만 경고 처분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