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등급 강등에 毒오른 신흥국…독자 신평사 설립 잰걸음

by이정훈 기자
2017.06.30 11:13:26

국가등급 강등에 불만품은 中도 찬성모드로
9월 브릭스 정상회의서 논의 본격화할 듯



[이데일리 이정훈 기자] 아빈드 수브라마니안 인도 정부 수석 경제고문이 올초 한 대학에서 두 개의 차트를 보여주자 일단의 인도 대학생들이 분노를 표시한 일이 있었다. 하나의 차트는 인도의 꾸준한 경제 성장세와 낮은 국내총생산(GDP)대비 정부부채 비율을 보여주는 내용이었고 다른 하나는 중국의 더딘 경제 성장세와 빠르게 늘어나는 GDP대비 정부부채 비율을 나타낸 그래프였다. 수브라마니안 고문은 두 차트를 비교해서 보여주며 “국제 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이런 중국에게는 계속 `A+`를 유지해오다 부채 비율이 빠르게 올라가던 2010년에는 `AA-`로 오히려 올렸다. 그런데 인도에겐 `BBB-` 밖에 주지 않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가 보여준 차트의 제목은 S&P 회사 이름을 비꼰 `형편없는 기준(Poor Standards)`이었다.

국가신용등급은 이렇듯 늘 논란거리다. 인도와 중국은 종종 이같은 비교대상이 된다. 수브라마니안 고문은 많은 신흥국 정부 인사들을 만날 때마다 인도에 대한 국가신용등급 평가를 지난 2008년 금융위기 당시와 비교해곤 한다. 신용평가사가 위기 징후를 미리 파악하고 경고하기는 커녕 모기지담보증권(MBS)에 최고 신용등급을 줘 위험을 부추겼고 위기가 터진 이후에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듯 등급을 낮춰 버려 위기를 더 키웠다는 주장이었다.

이 때문에 인도를 위시한 브라질, 러시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소위 브릭스(BRICS) 국가들은 선진국 신용평가사에 대항하기 위해 독자적인 신용평가사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들 국가들은 올 9월 중국 광둥성 샤먼에서 열리는 제9차 브릭스 정상회의에서 이 문제를 논의할 예정이다. 그동안에는 중국이 이 사안에 무덤덤한 반응을 보인 탓에 추진력이 떨어졌지만 지난 5월 무디스가 중국 국가신용등급을 강등하면서 중국도 선진국 신용평가사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한 상태라 논의에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예상된다.



신흥국들이 가진 가장 큰 불만은 자신들의 국가신용등급이 선진국들에 비해 너무 자주 강등된다는 것이다. 제이콥 주마 대통령이 프래빈 고단 재무장관을 해고한 지난 4월 남아공은 국가신용등급이 정크(=투기등급)로 강등되고 말았다. 지난해 쿠데타 실패 이후 터키도, 2015년 지우마 호세프 전 대통령의 부패 스캔들이 터졌을 때 브라질도 국가신용등급이 곧바로 떨어졌다. 로드에벳의 펀드매니저인 리 트롭도 이같은 점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 트롭 매니저는 “신용평가사들이 이런 국가들의 정치 이벤트에 대해 종전보다 더 신속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블룸버그에 따르면 지난해 S&P와 무디스, 피치 등 3개 신용평가사가 신흥국 국가와 기업 신용등급을 강등한 횟수가 무려 1971건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신용평가사들이 공격적으로 변하고 있어 스스로 위기의 리스크를 키우고 있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물론 그런 비판도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지난 1999년 지오반니 페리, 리우 리강, 조셉 스티글리츠 등 3명의 경제학자들은 공동으로 발간한 `신용평가사의 경기순응적 역할`이라는 논문에서 지난 1997년 터진 아시아 외환위기에 대해 “위기 초기 국면에서 신용평가사들이 공포와 위기 확산을 부추긴 면이 있다”고 비판했었다. 지난해 세계은행(WB)이 내놓은 보고서를 봐도 지난 1998년부터 2015년까지 20개 개발도상국들의 국가신용등급 강등은 해당 국가의 단기금리를 평균 1.38%포인트씩 끌어올렸다. 특히 정크로 등급이 강등된 경우엔 투자적격등급 채권에만 투자할 수 있도록 한 내부 규정을 가진 일부 기관투자가들은 해당 국채를 한꺼번에 내다 팔 수 밖에 없고 이는 그 국가에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선진국과 달리 신흥국의 경우 안정적인 자국내 기관투자가나 깊이있는 시장을 가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미국의 경우를 보면 지난 2011년에S&P가 국가신용등급을 `AAA`에서 `AA+`로 한 단계 떨어뜨렸는데도 미 국채금리는 오히려 더 내려갔다.(=국채가격 상승) 달러화가 가진 기축통화라는 위상이 있는데다 미국 국가신용등급 강등이 글로벌 위기상황으로 인식된 탓에 기관들이 안전자산인 미 국채를 더 사들였기 때문이다. 지난해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국민투표 당시 영국 국채금리도 내려갔었다.

3대 신용평가사들은 “선진국 신용평가사의 경우 100년간에 걸친 엄청난 트랙 레코드를 가지고 있다”며 자신들을 정당화하지만 그런 주장 자체가 시장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신흥국들의 인식을 자극한다. 다만 브릭스가 독립적인 신용평가사를 만들더라도 시장 참가자들은 또다른 불공정성을 문제삼을 수 있는 만큼 과연 시장에서 신뢰를 얻을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