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암 100년)①경제 격변기, 다시 그를 찾다
by류의성 기자
2010.02.02 14:43:18
오는 12일 고 이병철 회장 탄생 100주년
자본금 3만원에서 매출 136조 기업으로
[이데일리 류의성 조태현 기자]
지난 1983년 2월 일본 도쿄의 한 호텔. 호암은 며칠째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기나긴 장고 속에 그의 모습은 핼쑥해졌다. 잘못된 선택이라면 삼성그룹에 생존위기가 닥칠 수도 있는 중요한 순간, 그는 마침내 결단을 내리고 서울에 전화했다.
그리고 다음 날 한 일간지에 다음과 같은 제목의 선언문이 실린다. `우리는 왜 반도체 사업을 해야 하는가`.
호암은 최첨단 산업인 반도체에 삼성의 미래를 걸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오늘날 세계 최강인 삼성전자의 메모리반도체 사업은 이렇게 시작됐다.
정준명 전 삼성 회장비서실 비서팀장은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반도체에 얽힌 호암의 일화를 소개했다.
호암은 당시 삼성전자 도쿄지점에서 근무하던 그에게 반도체는 무엇으로 만드냐는 질문을 던졌다. 정 전 비서팀장은 "경제성이 높은 실리콘이 주로 쓰인다"고 답했다. 그러자 실리콘은 뭐냐는 호암의 질문이 돌아왔다. 이에 "실리콘은 모래에서 추출되는 규소"라고 답했다. 그러자 호암은 "모래는 흙 아이가? 그럼 반도체는 흙으로 만든다케야제, 그렇게 어렵게 말하노?"라며 명쾌하게 풀이했다.
그에게 있어서 반도체 사업 취지와 목표는 바로 `영국의 증기기관` 이상이었다. 미래를 보는 탁견과 신념을 가지고 그는 반도체 사업을 독려해 나갔다.
삼성전자 전현직 관계자들은 반도체 사업에 있어서 호암의 최고 승부처를 지난 1987년 착공한 3라인으로 꼽는다. 호암은 1986년 7월 1메가 D램 양품을 확보하기 전부터 3라인 투자를 재촉했다. 김광호 전 삼성 부회장은 "선대회장께서는 기흥에 오시면 그때마다 창문 아래를 가리키며 저 자리(현재 3라인)에 라인이 서면 전체적인 조화가 잘 맞을텐데.."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했다”고 회고한다. 3라인을 빨리 지으라는 독촉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임원들은 예상 건설비로 3억4000만달러가 소요되는 막대한 투자를 주저했다. 1라인과 2라인 건설로 적자였던 회사 재정에 엄청난 부담을 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당시 회사 안팎에서는 "반도체사업 때문에 그룹이 위험하다", "회장의 판단이 흐려졌다"라는 소리들이 나돌았다. 그만큼 상황이 절박했다. 그러나 호암은 "왜 늦느냐. 빨리 해라. 우리에게 좋은 기회가 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도 임원들이 움직이지 않자, 그는 "착공식에 참석하겠다"며 1987년 8월7일 착공할 것을 엄명했다.
당시 세계 D램 반도체 시장은 1984년 이후 폭락으로 침체기였다. 그러나 1987년 후반부터 반도체 시장이 살아나면서 물건이 없어서 못 팔 정도의 호황기가 찾아왔다. 호암의 3라인 투자는 반도체 신화의 기반이 됐다. 특히 D램 반도체 사업에 자신감을 가지게 된 계기였다고 삼성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호암은 기업경영과 관련한 많은 어록을 남겼다. 그는 "사업상 위기는 바로 도약의 발판"이라고 늘 말해왔다.
"기업은 양면대처를 잘해야 한다"면서 지난 1984년에는 "호황과 불황에 양쪽으로 동시에 대처하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미래에 대비해야 한다는 말도 자주 강조했다. "10년 뒤를 대비하라"라는 말은 그의 어록 중 핵심으로 유명하다. 젊은 시절 토지투자 사업으로 엄청난 부를 형성했으나 땅값 폭락과 은행대출 중단으로 큰 실패를 맛 본 쓰라림에서 얻은 교훈이다.
"사업을 할 때는 국내외 정세의 변동을 정확하게 통찰하고 무모한 과욕을 버려야 한다."
"자기 능력과 한계를 냉철하게 판단해 요행을 바라는 투자를 피하라"
"대세가 기울어 이미 실패라고 판단이 서면 깨끗이 미련을 버리고 차선의 길을 택해야 한다"
그는 호암자전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호암은 노력하지 않는 사장을 매우 싫어했다. 부단히 공부하고 노력해 그릇을 키워야한다고 누차 강조했다.
"사장의 기량을 넘어 기업이 커질 수는 없다. 잠시도 긴장을 풀 수 없고, 잠시도 쉴 수 없는 사장의 자리는 사장실의 안락의자처럼 편안한 자리가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현장경영의 중요성도 역설했다. 그는 지난 1979년 간담회에서 "꼭대기부터 저 밑에까지 알아야 참다운 경영자가 될 수 있다"며 "현장을 모르는 경영자가 어떻게 큰 방향을 잡을 수 있겠는가"라고 지적했다.
그의 현장경영 철학은 이건희 전 삼성 회장에게도 그대로 전수됐다. 이 전 회장은 에세이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 "선친은 경영 일선에 항상 나를 동반하셨고, 많은 일을 직접 해보라고 주문하셨다. 하지만 어떤 일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설명해주지는 않으셨다. 이럴 때 이렇게 하고 저런 경우에는 저렇게 처리하라고 구체적으로 가르치는 식이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호암의 엄격한 현장 중심 경영을 통해 경영 일선에서 발견하는 다양한 문제점을 느끼고 대처하는 지혜를 배웠다는 것이다.
호암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 냉정하고 엄격하다라는 평도 있고 매우 인간적이라는 의견도 있다.
서울 태평로 2가 삼성 본관 옆에 동방생명(현 삼성생명)과 중앙일보 사옥을 지을 때 일이라고 한다. 호암은 외벽 대리석 색상을 직접 골랐고, 대리석 칸과 칸 사이 간격을 몇 mm로 할 것인가까지 일일이 지정해줬다고 한다.
그는 평소에 술을 별로 하지 않았고 사치도 싫어했다. 순시 도중 한 이사실에 들러 "잘도 꾸며놨네. 카펫까지 깔아놓고"라며 한마디 던지고 나갔다. 그의 말에 그룹 전체 이사실의 카펫들이 모두 사라졌다.
신훈철 전 삼성항공 사장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호암과의 추억도 흥미롭다. 신 전 사장은 1956년 신입사원으로 입사, 1993년 상담역을 마지막으로 은퇴할 때까지 40년 가까운 세월을 삼성맨으로 살았다.
호암은 1961년 한국경제인협회 초대회장으로 외자도입 교섭을 위한 사절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했다. 신 전 사장은 당시 호암의 수행비서 역할을 했다. 그는 비서로서 챙길 것이 많았던 데다 장시간 비행에 따른 피로까지 겹쳐 눈이 빨갛게 충혈됐다.
"회장님께서 대뜸 약을 한 알 쥐어주시면서 좀 자고 푹 쉬어라 하시더군요. 얼떨결에 받아 쥐고 방에 들어가서 먹고 누웠는데 이튿날 회장님이 막 흔들어 깨우셔서 겨우 일어났지요. 알고보니 수면제였습디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차갑게 느낄지 모르겠지만 회장님은 참 자상하신 분이었습니다."
호암의 인재 중시 경영은 유명하다. 그는 호암어록에서 "기업은 문자 그대로 업을 기획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사람이 기업을 경영한다는 소박한 원리를 잊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는 "나는 내 일생을 통해서 80%는 인재를 모으고 육성시키는 데 시간을 보냈다"며 "삼성이 발전한 것도 유능한 인재를 많이 기용한 결과"라고 말했다.
문화강국을 꿈꿨던 호암에 대해 이종상 화백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와의 일화를 이렇게 떠올렸다. 이 화백은 5만원권과 5000원권에 들어간 신사임당과 율곡을 그린 한국화의 대가다.
그는 과거 삼성 본관에 벽화를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고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하루는 회장님이 제게 와서 이런 저런 말씀을 하세요. `사람들이 나보고 돈 많이 벌었다고 하지`? 그래서 저는 `돈 많이 버셨죠` 라고 답했죠. 회장님은 `나는 평생 돈을 벌어본 적이 없어` 하시는 거예요. 무슨 말씀이신가 의아했는데 회장님은 `나는 사람을 벌었지`라고 하셔서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평소에 인재를 얼마나 중요시 여기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가 청년 시절 읽었던 `여공애사`라는 책을 읽고 직원들의 복지후생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고 전해진다. 그 책은 여공들의 애환을 담은 책으로, 그들의 생활이 열악하고 비참했음을 그리고 있다.
인재를 소중히 여기는 그의 정신은 이 전 회장에게도 그대로 계승됐다. 이 전 회장은 에세이를 통해 "기업이 인재를 양성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죄악이며 양질의 인재를 활용하지 못하고 내보내는 것은 경영의 큰 손실"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부정보다 더 파렴치한 것이 바로 사람을 망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전 회장은 “한 가지 전문분야에만 정통하고 다른 분야는 아무 것도 모르는 I형 인재보다는 자기 분야는 물론이고 다른 분야까지 폭넓게 알고 있는 종합적인 사고 능력을 갖춘 T자형 이재가 훨씬 더 인정받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견한 바 있다.
호암을 측근에서 보좌한 삼성맨들은 호암에 대해 소신껏 일할 수 있도록 믿고 맡기는 인재 용병술을 썼다고 회고한다. 호암은 평소 사람을 쓰는 것은 신중하지만 일단 기용하면 모든 것을 맡기는 `신뢰와 책임`을 직접 보여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