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암흑기 빠져나온 걸 실감”…신한울 3·4호기로 원전 생태계 부활

by박순엽 기자
2023.05.16 11:35:58

‘친환경에너지 기업’ 도약하는 두산에너빌리티
내년 상반기엔 SMR 제작과 함께 ‘풀-가동’ 예정
“올해 직원 50명 충원한 데다 하반기 채용 계획”
가스터빈·풍력 기자재 분야에서도 자체 기술 갖춰

[창원(경남)=이데일리 박순엽 기자] “오늘 증기발생기에 쓰일 소재의 단조 작업을 보니 드디어 ‘탈원전’이라는 암흑기에서 빠져나왔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지난 15일 오후 경남 창원시 두산에너빌리티 단조 공장. 둔탁한 기계음과 함께 가열로에서 빨갛게 달아오른 버스 한 대 크기만 한 쇳덩어리(합금강)가 매니퓰레이터(로봇팔)를 통해 6~7층 건물 높이의 초대형 프레스 기계로 향했다. 프레스 기계 아래로 이동을 마친 쇳덩어리는 1만7000톤(t)에 달하는 무게에 짓눌리기 시작했다.

성인 남성 24만명이 동시에 누르는 힘과 같이 위아래로 누르자 쇳덩어리는 더욱 붉게 타올랐다. 이 같은 단조 작업을 반복하면 쇳덩어리는 고온·고압에 견딜 수 있는 원자력 발전 기기의 소재로 탄생한다. 이날 단조 작업을 벌인 쇳덩어리도 신한울 3·4호기의 핵심 기기 중 하나인 증기발생기에 들어갈 재료로 쓰이게 될 예정이다.

두산에너빌리티 창원 본사 단조공장에 설치된 1만7000톤 프레스기가 신한울 3·4 주기기 중 하나인 증기발생기 단조 소재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두산에너빌리티)
두산에너빌리티(034020)는 이날 ‘신한울 3·4 주기기 제작 착수식’을 열었다. 이 같은 대규모 원전 주기기 수주는 2014년 이후 9년 만이다. 이는 지난 정부가 내세운 탈원전 정책 영향으로 신한울 3·4호기를 포함한 원전 건설이 전면 중단돼서다. 그러다 지난 3월 한국수력원자력과 맺은 2조9000억원 규모의 신한울 3·4 주기기 공급계약으로 공장은 다시 제 역할을 찾게 됐다.

다만, 시끌벅적했던 착수식과는 다르게 총 5개 동(베이)으로 이뤄진 원자력 공장은 비교적 한산했다. 지난해 12월까지 신고리 5·6호기에 들어갈 주기기를 모두 공급한 뒤 일감이 끊겼기 때문이다. 두산에너빌리티 관계자는 “지난 10년간의 영향으로 2000년대 후반 원전 르네상스가 기대되던 시절보다는 공장 분위기가 차분한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두산에너빌리티 창원 본사 원자력공장에서 직원이 교체형 원자로헤드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두산에너빌리티)
원자력 공장은 신한울 3·4 주기기와 소형모듈원자로(SMR) 소재 제작에 희망을 걸고 있다. 그동안 원전 제작 중단으로 공장 앞에 그대로 보관됐던 주단 소재(원자력 압력 용기를 만드는 금속 소재)들도 속속 제작에 들어갈 채비를 마쳤다. 신한울 3호기 내 증기발생기에 쓰일 튜브 시트는 이날 내부 부식을 막기 위한 크래딩(clading) 용접 작업에 들어가기도 했다.

두산에너빌리티의 이 같은 변화에 함께 일하는 협력업체들도 저마다 기대감을 드러냈다. 발전·산업 플랜트의 설계와 정비를 담당하는 중견기업 수산이앤에스의 한봉섭 대표는 “지난 5년간 탈원전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으나 최근 신한울 3·4호기 건설이 재개되면서 현장에 생동감이 넘치고 있다”고 말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내년부터 원자력 공장 2개 동을 SMR 전용 공장으로 전환한다. ‘글로벌 SMR 파운드리(생산 전문) 사업’을 벌이겠다는 회사 방침에 따라 관련 수주 물량에 대응하는 전용 공장을 구축하는 셈이다. 앞서 두산에너빌리티는 지난 3월 미국 SMR 업체인 뉴스케일파워와 SMR 소재 제작 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내년 상반기쯤 SMR 수주 물량까지 더해 원자력 공장이 가득 찬 상태에서 가동되리라고 보고 있다. 이에 인력 채용 등 원전 생태계 활성화에도 힘이 실릴 것으로 보인다. 이도현 두산에너빌리티 원자력BG 원자력 공장장은 “지난해 기준 160명에서 50명 정도 직원을 더 충원했고, 하반기에 더 채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가스터빈의 핵심 구성품인 로터 조립체 (사진=두산에너빌리티)
두산에너빌리티는 원전 외에도 터빈·풍력 발전 분야에서 기술 자립도를 높이며 에너지 기업으로서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이날 찾은 터빈 공장에선 ‘기계공학의 꽃’으로 불리는 발전용 가스터빈이 한창 제작 중이었다. 가스터빈은 항공·조선 산업 등 최첨단 부품 산업과 연계돼 파급 효과가 큰 사업 분야로, 한국은 세계 5번째로 가스터빈 원천 기술을 보유한 국가다.

가스터빈 내부는 연료가 압축된 공기와 만나 폭발을 일으키며 발생하는 배기가스로 섭씨 1500도 이상까지 올라간다. 내부 블레이드 등엔 이를 견디도록 공기 통로를 만드는데, 이는 촘촘한 구멍이어서 정교한 기술력이 필요하다. 두산에너빌리티는 이러한 기술을 바탕으로 현재 전량 해외 제품인 국내 가스터빈 150기를 국산 제품으로 하나하나 바꿔 간다는 방침이다.

이상언 두산에너빌리티 파워서비스BG GT Center 담당 상무는 “2020년 국내 최초 가스터빈 국산화에 성공한 데 이어 오는 7월이면 김포 열병합발전소에서 처음으로 상업 운전을 가동할 계획”이라며 “국내 공급망(서플라이 체인)을 통해 90% 부품 공급이 이뤄지는 만큼 국내 중소·중견 기업의 고부가가치 산업 성장에 힘을 보태는 의미도 있다”고 설명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가스터빈 개발에 이어 수소터빈 개발에도 속도를 높인다. 수소터빈 분야에선 ‘패스트 팔로어’(새로운 기술을 뒤쫓는 기업)가 아닌 ‘퍼스트 무버’(개척자)가 되겠단 전략이다. 두산에너빌리티는 현재 국책과제로 50% 수소 혼소와 수소 전소 연소기를 동시에 개발하고 있으며, 오는 2027년엔 380메가와트(MW)급 수소 전소 터빈을 개발한다는 계획이다.

두산에너빌리티 창원 본사 풍력2공장 전경 (사진=두산에너빌리티)
아울러 이날 창원공장의 한 축인 풍력 공장에서도 제주 한림해상풍력에 공급할 나셀(Nacelle)과 허브(Hub)를 제작하는 데 분주한 모습을 보였다. 버스 한 대 크기만 한 나셀은 풍력발전 시스템의 주요 구성품이 배치된 공간이며, 허브는 블레이드(날개)가 풍력을 전환해 전달한 토크(회전에너지)를 증속기로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제품이다.

두산에너빌리티는 지난 2005년 풍력 사업을 시작해 연구·개발비로만 2000억원을 투자, 나셀·허브 등 풍력 발전 기자재에 대한 자체 원천기술을 확보했다. 최근엔 4300세대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8MW급 대형 모델도 제작해 실증을 벌이고 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국내 해상풍력 시장을 개척해 국내 중소 부품업체와 함께 관련 기자재 공급한다는 방침이다.

송치욱 두산에너빌리티 파워서비스BG 풍력 생산 담당 상무는 “비교적 바람의 질이 좋지 못한 우리나라에선 해외 대형 풍력 기자재 업체 3사보다 두산에너빌리티의 제품이 더 나은 효율을 보인다”며 “국내 프로젝트에 적합한 기자재를 갖춘 데다 국내 해상풍력 최다 공급 실적을 보유한 만큼 추가 수주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두산에너빌리티 창원 본사 풍력2공장 내부 모습. 제주 한림해상풍력단지에 공급할 5.5MW 풍력발전기 나셀 제작에 한창이다. (사진=두산에너빌리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