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한 사장이 사의를 표명한 까닭은

by이학선 기자
2011.08.16 16:11:47

표면적으론 "하이닉스 매각과정 잡음..개인적 한계"
금융계에선 매각차질 우려한 '일종의 승부수' 관측
채권단, 매각작업 예정대로..일각에선 표류 가능성

[이데일리 이학선 이준기 기자] 하이닉스(000660) 매각과 관련해 소신의견을 밝혀왔던 유재한정책금융공사 사장이 16일 돌연 사의를 표명해 배경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유 사장의 임기는 내년 10월까지로 아직도 1년 넘게 남아있다. 정책금융공사가 보유한 하이닉스 지분은 2.59%에 불과하지만 정부가 지분 100%를 보유한 금융기관이라 유 사장은 사실상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이라는 게 금융계의 평가다. 

유 사장이 밝힌 표면적인 이유는 자신의 발언이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에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수합병(M&A) 업계에선 하이닉스 매각이 또다시 불발로 끝날 것을 우려한 유 사장이 일종의 승부수를 던진 게 아니냐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유 사장을 사의표명에 이르게 한 직접적 계기는 지난 11일 기자간담회였다. 채권단이 하이닉스의 구주(舊株)를 많이 인수하는 기업에 가산점을 주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자 유 사장 스스로 이를 해명하기 위해 자청한 간담회였으나, 뜻하지 않은 후폭풍을 맞았다.

그는 이 자리에서 "최근 하이닉스 매각과 관련해 잘못된 루머가 확산되면서 딜 자체가 훼손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며 "하이닉스 매각시 구주를 많이 인수하는 기업에 가산점을 줄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인수후보자 입장에선 구주보다 신주(新株) 인수를 선호한다. 신주를 인수하면 하이닉스에 돈이 남게돼 나중에 설비투자 등에 활용할 수 있지만, 구주 인수대금은 채권단으로 흘러들어가 고스란히 하이닉스 밖으로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결국 매각무산을 우려한 유 사장이 인수후보자에게 많은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한 자리였던 셈이다.
 
그러나 정작 인수후보자인 SK텔레콤(017670)과 STX(011810)에선 볼멘소리가 터져나왔다. 유 사장은 경영권 프리미엄 총액을 많이 써낸 곳에 높은 점수를 주겠다고 했는데 이는 구주 인수를 많이 하는 기업에 가점을 주겠다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논란이 확산되면서 유 사장이 느낀 심리적 부담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날 오전 부서장급 이상의 간부들에게 사의표명 사실을 알리면서 "개인적인 능력의 한계를 느낀다"며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정책금융공사 고위관계자는 "전혀 예상을 못했다"며 "M&A를 진행하다보면 어느 정도 시끄러운 일이 일어날 수 있는데  (유 사장이)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일부에선 현대건설에 이어 하이닉스마저 매각과정에서 잡음이 흘러나오는 것에 금융당국이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자 유 사장이 당국에 승부수를 던졌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자신에게 계속 일을 맡기든 사표를 수리하든 양자택일하라는 얘기다.
 
유 사장으로선 하이닉스 매각을 깔끔히 마무리 짓지 못할 바에야 이쯤해서 차라리 사장직을 던져버리는 게 낫다고 판단을 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유 사장은 내년 총선 출마자 후보에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그는 지난 18대 총선 땐 대구 달서구에서 여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한 바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그간 정책금융공사 내부에선 인수후보기업이나 채권단 내부에서 유 사장을 지나치게 흔들어왔다는 얘기가 적지 않았다"면서 "유 사장 개인을 봤을 땐 어떤식으로든 돌파구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유 사장이 하이닉스 매각 자체가 무산될 것을 이미 예견한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유 사장은 지난 11일 기자간담회에서 "이 딜은 제 직(職)을 걸고 공정하게 하겠다"고 밝혔다. 하이닉스 매각작업이 순탄치않을 경우 스스로 물러나겠다며 배수진을 친 것이다.

사실 유 사장이 밝힌 내용을 뜯어보면 STX보다 자금동원력이 뛰어난 SK텔레콤에 유리한 점이 적지 않다는 게 M&A 업계의 평가다. 그런데도 반발이 심한 곳은 정작 SK텔레콤이다. SK텔레콤은 최근 하이닉스 매각이 구주 중심으로 이뤄질 경우 본입찰에 참여하지 않을 수도 있다며 채권단을 강하게 압박한 바 있다.

M&A업계 관계자는 "유 사장은 SK텔레콤이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에 납득하기 어렵다는 태도를 보여왔다"며 "SK텔레콤이 발을 빼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본인 스스로 물러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SK텔레콤은 하이닉스 인수시 공정거래법에 따라 1년내 하이닉스(SK의 손자회사)의 지분을 20% 이상 확보해야 하는 부담이 있다. 따라서 경영권 프리미엄이 붙는 구주인수 비율을 최대한 낮추고 신주를 더 많이 인수하는 게 유리하다. 이 점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 인수의 실익이 크지 않다는 게 SK텔레콤의 판단이다. 더구나 경제개혁연대 등 시민단체와 소액주주들은 SK텔레콤의 하이닉스 인수에 반대입장을 밝혀 내부적으로도 곤혹스러운 상황이다. 

현재 하이닉스 채권단은 유 사장의 사의표명과 관계없이 매각작업을 계속 진행한다는 방침이다. 하이닉스 주식관리협의회 주관기관인 외환은행 관계자는 "내달 중순 본입찰을 실시해 우선협상대상자를 선정하고 연내 M&A를 마무리한다는 당초의 계획에서 바뀐 것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다만 사실상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볼 수 있었던 유 사장이 사의를 표명함에 따라 하이닉스 매각작업이 또다시 표류할 가능성도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올해 안에 매각을 마치지 못하면 내년 총선과 대선 등 정치이슈와 맞물려 하이닉스 매각작업은 오는 2013년 이후로 밀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앞서 정책금융공사 관계자는 매각작업이 차질을 빚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워낙 갑작스러운 일이 벌어져 지금으로선 어떤 말도 하기 어렵다"며 "어떻게 대응할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