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고 황량한 '세한도'가 당대 최고 문인화인 이유는?

by김은비 기자
2020.12.15 11:00:00

세한도 진면모 알기 위해선 추사 삶 봐야
명문가 자제로 서예·예술에 ‘천재성’ 보여
척박한 귀양생활 '세한도'에 함축적으로
중국 2000년 서예사 아우르는 ‘추사체’

[이데일리 김은비 기자] “‘세한도’는 당대 최고 문인인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온 정성을 다해 그린 그림이다. 그림 속 나무, 집, 여백이 상징하는 바와 그림을 그렸던 배경까지 여러 면을 볼 수 있어야 작품의 진정한 가치를 알 수 있다.”

추사 김정희 연구의 권위자인 최완수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은 김정희의 대표적 문인화인 국보 제180호 ‘세한도’가 왜 대단한 작품인지에 대해서 이같이 설명했다.

최근 미술품 소장가 손창근 선생이 아버지 대부터 소장하고 있던 ‘세한도’를 아무 조건 없이 국가에 기증해 화제를 모았다. ‘세한도’는 김정희가 1844년 제주도 귀양살이 시절, 변함없이 사제간의 의리를 지킨 제자 이상적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달부터 특별전 ‘한겨울 지나 봄 오듯-세한·평안’을 개최하고 ‘세한도’를 국민에 공개했다.

하지만 ‘세한도’의 명성만 듣고 작품을 접한 사람들은 얼핏 왜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는지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제자에 대한 고마움을 담았다고 했지만 그림은 온화하고 정성스럽다기보단 거칠고 단출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가로 69.2cm, 세로 23cm 크기의 종이 한가운데 어설픈 집 한 채와 소나무, 잣나무 몇 그루만 그려져 있다. 메마른 붓에 빡빡한 먹을 묻혀 종이에 문지르듯 그린 그림은 황량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전문가들은 ‘세한도’의 진면모를 알기 위해선 추사의 삶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추사의 삶을 정리한 영상 ‘김정희의 삶과 예술’을 국립중앙박물관 유튜브에 올리기도 했다.

(그래픽= 문승용 기자)


김정희는 1786년 대단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추사의 고조할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냈고 증조할아버지 김한신은 영조의 사위였다. 아버지 김노경은 이조판서를 지냈다. 이렇듯 든든한 가문의 배경에 더해 김정희는 어릴 적부터 글씨와 그림 그리기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정조 때 정승을 지낸 채제공은 김정희가 7살 때 쓴 ‘입춘대길’이라는 글씨는 보고 “이 아이는 반드시 명필로 이름을 떨칠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듬해에는 북학파의 박제가가 김정희가 쓴 ‘입춘대길’을 보고 “이 아이를 키워 가르치고 싶다”고 말했다. 박제가의 제자가 된 김정희는 그를 통해 당시 청나라에서 유행한 고증학과 금석학(비석에 새겨진 글을 바탕으로 언어를 연구함)을 배울 수 있었다. 유 교수는 “이때부터 김정희는 기회가 된다면 스승처럼 북경에 가야겠다는 꿈을 키웠다”고 설명했다.

23살이 된 김정희는 아버지가 청나라 사신으로 가면서 함께 중국 연경으로 가게 됐다. 수행원 자격으로 따라갔던 김정희는 자유롭게 중국의 다양한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또 완원, 옹방강 등 중국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가능성을 한껏 키울 수 있었다. 금석학을 발전시킨 대표적 인물이었던 두 사람은 김정희의 글씨에 한눈에 매료됐다. 이때부터 김정희의 개성적 서체인 ‘추사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추사체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옛 글씨체를 연구해 만든 새로운 글씨체로 김정희는 평생 추사체를 발전시켰다.

김정희는 이처럼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34세에 장원 급제했다. 가문의 권세로 조정에서 급제를 축하할 정도였고 이후에도 명성을 날렸다. 규장각에서 대교를 지낸 그는 성균관 대사성, 형조참판 등을 지냈다.

김정희가 당대 위대한 예술가이자 학자였다는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졸기(망자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기록)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대단한 역사적 인물에 대해서만 사망 기록이 남겨져 있다. 마지막 관직이 병조참판이었던 김정희는 지위 자체만 보면 실록에 기록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철종 7년 10월 10일 기록에는 ‘(김정희는) 이조판서 김노경의 아들로 총명하고 기억력이 투철해 여러 가지 책을 널리 읽었으며, 금석문과 그림과 역사에 깊이 통달했고, 초서 해서 전서 예서에서 참다운 경지를 신기하게 깨달았다’는 내용이 있다.



세한도 늙은 소나무 뿌리 부분(사진=국립중앙박물관)


하지만 김정희는 가문이 힘을 잃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바뀐 삶을 살았다. 김정희는 55세 때 정적의 모함으로 아버지를 잃고 자신도 고문을 받아 만신창이가 됐다. 김정희 역시 사형에 처해질 뻔했으나 그보단 아래인 위리안치형을 받아 제주도로 귀양을 갔다.

특히 김정희가 8년간 귀양생활을 한 대정현은 제주도에서도 바람이 사납고 땅이 척박해 사람이 살기 힘든 곳이었다. 이곳에서 김정희는 울타리 밖도 벗어날 수 없었다. 유 교수는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없었던 추사는 그 어떤 때보다 자신과의 대화를 많이 했고 ‘세한도’, ‘추사체’ 등을 이 시기에 완성했다”고 설명했다.

‘세한도’에서는 당시 김정희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오다연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추위를 그림으로 그리기가 쉽지 않아 일반적으로 눈이나 메마른 나무를 통해 표현을 한다”며 “하지만 김정희는 가장 거친 종이 위에 마른 붓과 진한 먹을 사용해 한겨울 매서운 추위를 누구보다 멋있게 그렸다”고 말했다. 또 푸른 소나무와 촉백나무는 논어의 구절을, 창문 하나밖에 없는 집은 김정희의 귀양생활을 드러낸다.

화면 좌측에 김정희가 정성스럽게 쓴 제작 사유도 깊이를 더한다. 오 학예연구사는 “조선시대에 이렇게 상세히 그림의 제목과 제작 사유를 쓴 작품은 드물다”고 부연했다. 여기에 청나라 문인 16명이 쓴 극찬은 ‘세한도’를 더욱 빛낸다. 최 소장은 “추사가 당대 최고의 문인이었기에 이같이 함축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또 이를 알아봐 준 추사의 중국 동료 학자들이 있었기에 ‘세한도’가 완성될 수 있었다”고 부연했다.



귀양생활 중 김정희의 ‘추사체’도 완성된다. 유 교수는 “이때 당시의 추사체를 보면 괴이하다고도 말할 수 있지만 추사체의 변천 과정을 보면 중국 명필의 고전에서부터 오랜 연구를 통해 창의성을 발현한 것을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유 교수는 박규수가 쓴 ‘추사체 변천론’을 인용해 그 과정을 설명했다. 이에 따르면 ‘추사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여러 차례 바뀌었다. 청년시절에는 글씨의 획이 너무 두껍고 골기가 적었다는 흠이 있었다. …그러다 만년의 귀양살이 이후에는 드디어 남에게 구속받고 스스로 일법을 이루게 됐으니 신이 오는 듯 기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했다’고 돼 있다.

유 교수는 “이렇듯 김정희의 추사체는 중국 서예 2000년 역사를 아우르고 있다”며 “추사는 조선시대 서예사뿐 아니라 동양 서예사 전체에서 견줘도 위상이 뒤처지지 않는다”고 평했다.

김정희 초상(사진=국립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