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0년 역사를 들여다 본다..영주 부석사
by편집부 기자
2009.09.30 15:21:49
| ▲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제18호) (사진제공 여행작가 문일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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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편집부]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해진 이후로 수많은 사찰이 건립되었고, 천년의 역사가 넘는 천년고찰만도 셀 수 없이 많다. 그 많고 많은 천년고찰 중에서도 손에 꼽을 수 있는 사찰이라면 영주의 부석사를 빼 놓을 수 없다. 우리나라 최고의 건축물로 알려진 무량수전과 수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한 부석사는 허투루 돌아볼 곳이 아닌 길고 긴 역사 속에 숨어 있는 수많은 이야기와 함께 유구한 세월을 감내한 문화유산을 보듬어 보는 값진 시간이다.
부석사는 봉황산 자락에 깃들어 있는 사찰이다. 일주문과 천왕문을 지나면 부석사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대석축이 한 눈에 들어온다. 봉황산의 산자락을 깎아 만든 대석축은 천왕문에서 범종루와 안양루까지 이어진다. 부석사의 대석축은 세 개의 큰 석축과 다시 낮은 경계를 이루며 모두 아홉 단을 이루는데, 극락에 이르는 화엄의 구품정토, 구품만다라를 상징한다. 험준한 산자락을 깎고, 다지기를 반복하며, 무거운 돌덩이를 지고 정교하게 쌓았을 그 당시 사람들의 노고도 이쯤해서 한번 생각해보면 좋을 듯하다.
| ▲ 범종각에서 바라본 안양루와 무량수전 (사진제공 여행작가 문일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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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를 이야기할 때 무량수전을 빼놓을 수 없다. 우리나라 최고의 건축미학을 자랑하는 무량수전은 지금까지 오랜 세월을 묵묵히 품고, 아름다운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 사람들에게 진한 감동을 선사한다. 무량수전은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는 주심포공법 뿐 아니라 배흘림, 귀솟음, 안쏠림 기법 등 다양하고 독특한 건축수법이 사용되어 눈길을 끈다.
부석사에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문화재를 많이 품고 있다. 무량수전을 포함해 국보 5점, 보물 7점 등 모두 13개에 이르는 국가지정 문화재가 남아 있다. 부석사 경내를 두루두루 돌아보며 산재해 있는 문화재들을 하나 둘씩 곱씹어보는 것도 부석사만의 묘미다. 특히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의 부석사 창건설화와 관련된 부석과 선묘각,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가 나무로 자랐다는 선비화는 부석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 ▲ (시계방향) 범종각에서 법고를 두드리는 스님, 소백산맥 능선을 따라 펼쳐지는 일몰, 삼층석탑 앞에서 바라본 부석사의 일몰 (사진제공 여행작가 문일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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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가 가장 아름다울 때는 해가 서서히 저무는 저녁 무렵이다. 범종각에서 저녁 예불이 시작되면 범종각의 법고, 목어, 운판, 범종 등 사물을 두드리는 소리가 부석사 경내에 울려 퍼진다. 제법 리듬감이 느껴지는 법고소리가 잦아들면 은은한 동종소리가 메아리 치고, 사람들은 그 모습에 매료된 듯 경건하고 진지하게 바라본다. 저녁 예불이 끝날 즈음에는 소백산맥의 온화한 능선을 따라 넘어가는 해넘이의 장관이 펼쳐진다. 부석사에서 맛볼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선물이다.
| ▲ (시계방향) 소수서원의 전경, 고고한 기품이 흐르는 소수서원의 학자수, 유학생들이 기거하던 기숙사인 지락재와 학구재 (사진제공 여행작가 문일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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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 깊은 불교유적을 보았다면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유교유적인 서원을 빼놓을 수 없다. 소수서원은 조선시대 최초의 사립교육기관이자 나라로부터 편액, 서적,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은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1542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은 중국 백록동서원을 본따 양반자제 교육기관인 백운동서원을 세우게 되는데, 그 후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이 왕에게 진언하여 소수서원이라는 편액을 받게 된다. 소수서원에 들어서면 굽이도는 죽계천의 수려한 경관 속에 울창한 소나무 숲이 먼저 반긴다. 적송군락으로 이루어진 빽빽한 소나무 숲은 기품있는 소나무처럼 강직한 선비가 되라는 뜻으로 학자수라 부른다.
소수서원은 강학당(보물 제1402호), 교수들이 기거하던 직방재와 일신재, 선비들이 기거하던 학구재와 지락재 등의 교육공간과 문성공묘(보물 제 1403호)인 제사공간으로 나뉜다. 서원의 각 건물은 유교사상에 입각해 새겨볼 이야기도 많다. 스승의 그림자도 피한다하여 학구재와 지락재를 스승의 숙소인 직방재,일신재의 두칸 뒤로 물려 지은 것과 선비의 숙소를 선생의 숙소보다 한 단계 낮게 지은 것 등은 눈여겨 볼만 하다. 선생과 제자 간에 갖춰야할 도리, 선비로서의 마음가짐은 서원 곳곳에 배어 있다.
| ▲ (시계방향) 선비촌의 풍경, 선비촌내 고택의 안채 풍경, 선비촌을 걷고 있는 여행객, 선비촌에서 만난 꼬마 신랑과 각시 (사진제공 여행작가 문일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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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과 함께 조선시대의 유교사상과 소수서원을 더 자세히 알아볼 수 있도록 재현, 전시하고 있는 소수박물관과 옛 선비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선비촌도 둘러 볼 수 있다. 선비촌에는 두암고택, 만죽재 고택, 김뢰진가옥 등 기와집과 초가집 12동이 재현되어 있고, 각 고택에는 고택의 특성에 맞는 살림살이와 가재도구가 들여져 있어 선조들의 생활상을 엿보기에 충분하다.
| ▲ (좌) 금성단의 전경, (우) 금성대군이 위리안치된 위리안치지 (사진제공 여행작가 문일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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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의 건너편에는 금성단과 청다리는 꼭 들러보자. 금성대군은 조선 세종의 여섯째 아들로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순흥에 유배되었다.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을 모의했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금성대군 뿐 아니라 모의에 가담한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는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어 죽계천이 핏빛으로 물들어 흘렀다고 한다. 금성단은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했던 많은 사람들을 위해 제사를 올리는 곳으로, 금성단 주변에는 금성대군이 유배된 위리안치지가 복원되어 있어 안타까운 역사의 현장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금성단에서 선비촌으로 가다보면 죽계 제월교라는 다리를 만난다. 다리 입구에 조선 숙종 때 세워진 제월교비가 세워져 있다. 제월교는 예로부터 청다리로 불렸는데, 어렸을 적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고 하는 농담의 원조가 바로 이곳이다. 청다리는 단종복위운동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비운의 장소이며, 이 때 남겨진 아이들을 데려가 키우면서 생긴 말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