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김수헌 기자
2002.10.04 19:40:15
[edaily 김수헌기자]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요즘 대기업을 출입하면서 임원들을 취재하려면 영락없는 술래잡기입니다. 전화라도 할라치면 여직원 선에서 "회의중", "외출중"라는 말한마디에 차단됩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기업은 자사 기사가 실리면 사실 여부보다는 기자와 접촉한 내부자를 찾는데만 혈안이 되기도 합니다. 산업부 김수헌 기자가 기업들의 이같은 언론기피증을 꼬집었습니다.
"좀 전에 들어가는 걸 봤다"고 슬쩍 넘겨치면 이들 임원 비서들은 "잠시 다른방에 갔는데 시간이 오래걸릴 것 같다"는 "순발력 좋고 특별히 더 친철한" 안내로 대응합니다. 친분이 있는 임원들이 아니면 대부분 다 이런 식입니다. 더한 곳도 있습니다.
기업을 출입하다 보면 이른바 "취재장벽"이란 걸 만나게 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기업이나 정부부처나 사정은 매한가지겠죠.
대기업에는 관련부서에 직접 취재하는 것조차 어렵습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 정통한 임원을 직접 취재할라치면 이들은 "홍보실에 물어보시죠"라는 냉담한 반응으로 다가오기 일쑤입니다. 재수좋게 접촉이 돼도 말이죠.
오늘은 국내 최고 전자업체의 마케팅 담당 임원에게 전화를 했다가 여직원으로부터 "홍보실의 리코멘데이션(recommendation)이 필요하니 나중에 전화해달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습니다. 임원들이 많이 흔해져서 "하늘의 별"같지도 않은데 기자 상대할땐 "하늘의 별"보다도 더 높게 굴죠.
홍보실의 오버액션도 대단합니다. 정확한 취재기사가 나간 후에 그 내용을 인정하고, 많은 투자자들를 위해 알리는 것이 아니라 "취재원이 누구였냐"며 기자를 추궁해옵니다. 어떤 홍보맨들은 추궁이 안먹히면 읍소작전까지 필 때가 있습니다.
얼마전 모 전자업체의 인수합병건에 관한 정보를 취재, 보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확인전화가 쇄도하자 회사는 임원회의를 거쳐 예정보다 며칠 앞당겨 공식발표문을 내고 투자자들에게 알렸습니다. 홍보 담당자는 "당신때문에 고생했다"며 볼멘 불평을 늘어놓기도 했지만 "어쨌든 공식발표가 예정됐던 사안이었던 만큼 어쩔 수 없다"고 반응했습니다.
홍보관계자로부터 다시 연락이 온 건 그날 밤늦은 시각이었습니다. "회사에서 정보를 흘린 사람을 색출하기 위해 임원들 핸드폰의 통화기록 조회를 했는데, 한 임원이 당신과 통화한 기록이 나왔다. 그 사람이 맞느냐"
그 임원과의 통화여부를 떠나 그로부터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한 건 사실입니다. 저의 설명에 홍보관계자는 "기자와 통화한 임원이 유일하게 그 사람뿐"이라며 "그가 잘못하지 않았다면 정확한 정보출처를 알려달라"고 전화통에 매달렸습니다. 기사가 나가고 회사가 이를 확인발표까지 한 지 수시간 지난 뒤에 말입니다.
취재원 보호는 기자의 생명입니다. 그렇지만 무고한 임원이 다칠까봐 결국 피인수기업과 채권단쪽에서 취재한 것으로 입을 맞췄습니다.
얼마전 마늘협상 파동을 보도한 한 일간지 기자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보도 뒤 재정경제부로부터 "발설자를 알려달라"는 요청과 함께 "우리 부처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만이라도 대외적으로 밝혀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는 거죠.
기업이든 정부부처든 중요한 내부 일은 보안을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건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미 언론보도 뒤 스스로 결정해 공식발표까지 한 사안을 놓고 "발언자 색출"이라는 호들갑은 뭡니까.
기업의 이런 행태는 내부 입단속을 강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덤으로 기자의 취재활동을 위축시키려는 의도가 분명하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참으로 답답해져 오더군요.
휴대폰 검사까지 당하는 판이니, 조직 구성원들도 회사에 대한 로열티를 제대로 유지되겠습니까.
남보다 앞서 빠르고 정확하게 사실을 보도하고자 하는 언론 본연의 의무를 인정치 않고 사실을 발설한 책임을 내부자에게 떠넘기고자 색출작업을 벌이는 것은 우매한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최근 겪은 몇건의 사건들을 떠올리자 다시한번 어린시절 술래잡기 생각이 스치더군요. 머리카락이 보이면 안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