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조용철 기자
2005.11.22 18:01:46
[이데일리 조용철기자] 역시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 고통스럽습니다. 온갖 실력자들의 `더티 플레이`가 목격됐습니다. 이 상자를 열기를 꺼렸던 이유는 이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진실을 숨기려했던 노력이 하나둘 무위로 돌아가자 희생자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 희생의 본뜻을 왜곡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검찰을 출입하고 있는 경제부 조용철기자가 전합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한 사람의 절박감을 살아있는 우리가 어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국정원 `X파일`사건 수사가 핵심을 향해 치닫기 시작하자마자 이런 희생이 나와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국민의 정부시절 국가정보원의 불법감청과 관련해 검찰 소환조사를 받았던 이수일 전 국정원 국내담당 차장. 그는 이 세상에 대해 입을 다물기로 결심한 것인 양, 또는 모든 것을 내가 짊어지고 가겠다고 결심한 양,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는 3차례에 걸쳐 검찰 조사를 받았습니다. 불법감청 사실은 물론 신건 전 국정원장의 증거인멸 시도 정황 등에 대해서도 진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조사를 받은 뒤 그가 신 前원장의 측근과 통화했다는 내용이 그의 절망감을 대변하는 듯합니다. "많은 사람이 사실대로 진술했으므로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부인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것이다"고 했다고 합니다. 무서운건 개인간 신의가 아니라 모든 걸 지켜본 하늘입니다.
그는 신 전 원장의 구속되기 직전 전화를 걸어 "잘 모시지 못해 죄송하다"며 울먹이기까지 했다고 하니, 자살하기에 앞서 얼마나 많이 괴로워했는지를 짐작할 듯합니다.
대검찰청에서 이번 사건에 대해 진상조사를 하는 만큼 조만간 구체적인 자살이유가 밝혀질 것입니다. 자살결심의 이유 만큼이나, 결심을 하게했던 그의 괴로움, 절망감도 확인될 겁니다.
하지만 그가 정보기관의 고위 책임자로서 무덤까지 안고 가야 할 비밀사항을 검찰조사에서 누설한데 대한 자책감에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것이라는 시각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범죄를 감싸다가 실패했기에 자책감에 시달렸다는 건 고인을 수치스럽게 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또한 국가를 위해 노력한 것이 이제와서 범죄자 취급을 받은 것에 대한 자괴심도 있었을 것이라는 것도 진정한 이유는 아닐 것이라 믿고 싶습니다.
대학교 총장을 지낼 만큼의 도덕적 인품을 감안하면 그것보다는 그런 일을 막지 못한 일, 그런 일에 한때 동조했다는 사실, 그의 행동이 알려지면서 그로 인한 부끄러움이 무엇보다 컸을 것입니다. 범죄인줄 몰랐다가 범죄로 분하는 현실이 잘못된 것이 아니고, 범죄인 줄 알면서 막지 못하고, 동조했던 것이 이제사 범죄로 드러났기에 높은 인품의 인물도 무너질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의 죽음은 안타깝고 불행한 일로서 앞으로 결코 되풀이돼서는 안 될 비극입니다. 그렇기에 이 일을 정치권 갈등의 기폭제로 보는 시각은 경계되어야 합니다.
이 보다는 이씨의 안타까운 죽음이 이 땅에서 국가기관이 자행한 범죄를 추방하는데 촉매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희생이 생기지 않도록 앞으로 국가기관의 범죄행위 자체가 이땅에 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보기관 책임자들이 수난을 겪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실력자 또는 권력자를 위해 그들이 국가 정보기관을 불법적으로 사조직처럼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정보를 이용해 권력자에게 접근하고 이들의 환심을 살 수 있는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전방위로 불법 감청을 자행하면서 국가 정보기관이 권력자의 사조직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이 과거의 관행을 없애야 합니다.
검찰은 우선 신속한 자살진상규명을 통해 정치권의 억측을 잠재우고 당초 예정했던 대로 불법감청 문건 유출사건과 안기부 미림팀의 `X파일` 사건 등 안기부·국정원 불법감청 수사를 계속 진행해 나가야 합니다.
이를 통해 국가 최고정보기관인 국정원이 전국민을 상대로 자행한 무차별적·조직적인 불법감청 행위를 제대로 단죄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이같은 역사적 과오가 되풀이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