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안근모 기자
2009.08.04 17:37:46
[이데일리 안근모기자] 공정거래위원회에는 지철호라고 하는 인물이 있다. 지금은 카르텔조사국장인 그가 독점감시팀장을 맡고 있던 지난 2006년에 상당히 도발적(?)인 글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
지 팀장은 글에서 '이마트가 똑같은 요구르트인데도 지점마다 다른 값을 받는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이를 결정하는 것은 각 지점의 경쟁상황"이라는 분석을 내렸다. 경쟁이 심한 지역에서는 싸게 팔고 경쟁이 거의 없는 곳에서는 비싸게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결국 경제학의 기본 가정에 충실하게 기업은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 경쟁이 치열하면 가격을 인하하고 독과점적 지위에 있으면 가격을 인상하는 등의 행위를 하는 것이다. 기업이 이럴진대 경쟁 촉진과 소비자 보호를 본연의 임무로 하는 공정위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지는 자명하다"라고 결론지었다.
총 9편으로 마무리된 이 '궤변' 시리즈는 일종의 반론서였다. 당시 이마트는 월마트 점포를 인수하면서 공정위에 기업결합 신청을 했고, 이에 공정위는 이마트에 대해 '일부점포 매각'을 전제조건으로 달아 허용했다. 전제조건을 단 공정위의 조치에 비판 내지는 반발기류가 형성되자 실무를 맡았던 팀장이 펜을 빼든 것이다.
그렇다면 공정위의 시정조치로 할인점의 지역독점 문제는 해결됐는가. 필자를 포함해 할인점 이용자라면 '그렇지 않다'고 답할 것이다.
역시 경제학의 기본 가정에 충실하자면, 기업은 끊임없이 독과점적 초과이윤을 추구하고, 이렇게 초과이윤이 발생하는 독점시장에는 끊임없이 경쟁자가 출현해 이윤 쟁탈을 추구하고, 이같은 경쟁으로 인해 가격이 하락하고 소비자의 후생은 증대되며 국민경제의 생산성은 향상된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유통산업 현실은 교과서와 다른면이 있다. 대도시에서 대형 할인점포를 낼 수 있는 입지는 극히 제한돼 있으며, 따라서 특정업체가 특정지역에서 초과이윤을 누리고 있다 해도 경쟁자가 이를 넘보기 쉽지 않다.
할인점의 물건값, 특히 `품질대비 가격`을 단순 비교하기가 어려운 농수산물 값이 재래시장에 비해 비싸게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업형 슈퍼마켓(SSM: Super SuperMarket)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못해 치열하다. 밥줄이 달린 사안이라 그렇다.
자본력과 구매력을 앞세운 대형 유통기업들이 소형 할인점 또는 초대형 슈퍼마켓으로 영역을 넓히려 하자, 지역 상인들이 '영세한 서민들을 죽인다'며 강력히 반발하는 것이다.
하지만, SSM은 입지제한으로 인해 발생한 대형 할인점의 지역독점 현상을 상당부분 시정할 수 있는 매우 유력한 대안이다. 독점 할인점에 맞설 점포 터를 구하기가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이다.
이마트가 독점하고 있는 지역에 홈플러스 SSM이 들어서고, 홈플러스가 장악하고 있는 상권에 이마트나 롯데마트 SSM이 진입하면 경쟁이 활성화될 것이다. 물건 값이 떨어지고, 서비스는 향상될 것이며 경쟁을 극복하기 위한 업체들의 창의가 만발할 것이다.
유통업체의 경쟁은 지역 주민, 특히 엥겔계수가 높은 중저소득 서민의 후생을 높여줄 것이다. 경쟁에 내몰릴 대형 유통기업에게 SSM은 기회이자 시련일 것이나, 국민경제에게는 효율성과 생산성을 끌어 올려주는 촉매가 될 것이다.
4일 중소기업청이 SSM과 관련한 사업조정 권한을 시도지사에게 위임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지역상인을 유권자로 둔 지자체장들이 SSM을 쉬이 허가할 것 같지가 않아 대형 유통기업들은 "출점을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고 반발한다. 용케 출점하는 SSM이 있다 해도 시도지사로부터 매장면적, 취급품목, 영업시간을 통제받아야 한다. '우파정권'을 표방했던 이명박 정부가 매우 신속하게도 유통산업의 대로에 전봇대를 꽂은 셈이다.
'좌파정권'으로 불린 노무현 정부가 빵집, 세탁소 면허제를 골자로 한 '영세 자영업자 대책'을 내놨다가 백지화했던 것을 떠올리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슈퍼마켓 주인과 슈퍼마켓 고객, 누가 더 서민인가. 정부와 자유경쟁시장, 누가 더 서민을 보호하는가.
왜 소비자 후생과 국민경제의 논리에서는 이 문제를 들여다보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