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의 `뒤집기` 시도..재무약정 무력화 될까

by김국헌 기자
2010.08.03 15:17:27

1원까지 다 갚아야 외환銀 약정 압박 무력화
금융권 "주채권銀 바꾸긴 어렵다"
양측 절박한 상황서 `진흙탕싸움`..당국 교통정리해야

[이데일리 김국헌 민재용 기자] 재무 약정을 둘러싼 금융당국과 현대그룹의 파워게임이 기업과 은행의 역학관계에 균열음을 내고 있다. 재무구조 개선 약정 체결을 거부하고 있는 현대그룹은 3일 현시점에서 상환 가능한 차입금은 모두 갚았다며 현대그룹과 외환은행의 거래 종결을 선언했다.

현대가 노리는 것은 주채권은행의 변경. 재무약정 체결을 압박하고 있는 외환은행과 손을 끊고, 새로운 주채권은행으로부터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를 받겠다는 생각이다.

현대가 주채권 은행을 변경하기 쉽진 않겠지만, 금융 당국도 외환은행을 중심으로 한 약정 체결을 압박하기 힘들어진다는 점에서 현대의 반격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 지 재계와 금융권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채권단이 지난 2일부터 만기 대출금 회수에 착수하자, 현대그룹이 올해 만기가 도래하는 외환은행 차입금을 모두 상환하고 3일 주채권은행과 거래 종결을 선언했다.

지난달 29일 현대그룹 전체 채권은행 협의회가 이달부터 만기가 도래하는 대출금의 만기 연장을 중단하겠다고 결정한후 다음날인 30일 연내 만기인 외환은행 차입금 350억원을 조기에 상환했다. 다른 은행과 공동으로 대출해준 신디케이트론과 내년 1분기 만기인 차입금 900여 억원을 제외하면 사실상 대출금 전액을 갚았다는 것이 현대측 주장.

한 금융권 관계자는 "신디론이 남아 있으니 여신을 다 갚은 것은 아니다"라며 "중소기업이 대출을 다 갚고 주채권은행을 바꾼 사례는 있지만 대기업이 주채권은행 변경에 나선 것은 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채권단의 생각은 현대측과는 다르다. 채권단에 따르면 현대그룹은 신디케이트론을 제외하고도 외환은행에 외화대출, 선박금융 등 총 1100억여원의 여신이 남아있다는 것.


현대그룹은 사실상 전액 상환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외환은행의 돈을 1원 한푼까지 모두 갚아야 주채권은행으로서 지위를 무효화할 수 있다.



다른 금융권 관계자는 "현대가 신디론과 내년 만기 차입금까지 다 상환한다면 외환은행이 주채권은행 지위를 근거로 재무약정을 체결하라고 압박할 근거가 사라진다"고 지적했다.

그는 "채권단이 재무약정을 요구하는 논리는 현대에 자금을 지원한 금융기관이 부실화될 수 있다는 것"이라면서 "빚을 다 갚아버리면 이 논리가 무력화된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현대가 나머지 대출잔액까지 갚는다면, 외환은행을 중심으로 추진해온 약정 체결은 걸림돌에 부딪히게 된다.

그러나 주채권 은행을 변경하는 것은 어려울 전망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황당한 상황"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주채권은행 하겠다고 나서는 은행은 없을 거고, 은행권이 합의해야 주채권은행 변경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채권단이 대출을 회수하고, 기업이 빚을 갚고 주채권은행과 거래를 끊는 등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배경은 양측의 절박한 상황에서 비롯됐다.

경영권 분쟁의 씨앗이 될 현대상선(011200) 지분 8.3% 때문에 현대건설(000720)을 꼭 인수해야 하는 현대그룹과 나쁜 선례를 만들면 더이상 기업의 구조조정을 지휘할 수 없을 것이라고 우려하는 금융당국은 치킨게임에 가까운 파워게임을 벌이고 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현대그룹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재무약정을 체결하지 않으려고 하겠지만, 금융당국은 약정을 체결하기 위해 강력하게 대응할 것"이라며 "설사 주채권은행을 바꾼다고 해도 다른 주채권은행을 통해 약정 체결을 강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금융당국도 주채권은행이 바뀐다고 하더라도 재무개선약정(MOU)을 피하는 것은 어렵다는 입장. 금융당국 관계자는 "올해 해운산업이 아무리 좋아져도 현대그룹의 재무구조는 합격점에 도달하기 힘들다는 것이 채권단 전체의 판단"이라며 "현대그룹이 주채권은행을 변경한다 하더라도 주채무계열에 대한 신용위험평가 점수는 같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금융 당국이 치킨게임을 끝내기 위해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은행 관계자는 "재무약정을 둘러싸고 이렇게 끝장대립까지 갈 줄 몰랐다"며 "감독 당국이 교통정리를 해야 할 듯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