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불성실한 진료 아니라면 정신적 고통 배상 의무 없어"

by박정수 기자
2023.08.29 12:00:00

감기몸살 증상에 내과 진료 받다 호흡곤란
전원 권고에 병원 나온 뒤 쓰러져 심정지
의식불명 상태로 치료받다 심근경색으로 사망
1·2심, 원고 일부 승→대법, 파기·환송…"불성실한 진료 아냐"

[이데일리 박정수 기자] 의사가 환자의 수인한도(참을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설 만큼 현저하게 불성실한 진료를 했다고 보기 어렵다면, 환자가 입은 정신적 고통을 배상할 의무가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사진=이데일리 방인권 기자)
대법원 1부(주심 대법관 김선수)는 A씨 유족이 내과의사 B씨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피고 패소 부분을 파기하고, 이 부분 사건을 대구지방법원에 환송한다고 29일 밝혔다.

60대 여성 A씨는 2018년 2월 감기몸살 증상이 있어 남편과 함께 피고 의원에 내원했다. A씨는 오전 11시 10분경 피고 의원에서 주사를 맞고 수액을 투여받던 중 오전 11시 40분경 호흡곤란을 일으켜 수액 투여가 중단됐다.

피고는 청진기 등을 이용해 A씨의 호흡곤란 원인을 천식으로 파악하고, 덱사메타손(스테로이드 제재) 5mg을 주사로 추가 투여했다.

A씨가 그 후에도 가슴이 답답하다고 호소하자, 피고는 A씨와 남편에게 ‘택시를 타고 큰 병원으로 가라’고 전원을 권고했다. A씨는 피고로부터 전원권고를 받은 후 환자대기실에 앉아 있다가 옆으로 쓰러지듯 눕고 10초 후 다시 일어나 앉았다가 옆에 있던 남편의 부축을 받고 피고 의원을 걸어나왔다.

A씨는 피고 의원을 나온 후 5분이 지나지 않아 피고 의원 건물 앞에서 주저앉아 쓰러졌고, 119구급차로 F병원 응급실로 후송되던 중 심정지가 발생했다. 이후 A씨는 의식불명 상태로 치료를 받다가 2019년 12월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유족들은 환자에게 진료비 등을 받고 의료행위를 하기로 한 계약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았거나 의료인으로서 마땅히 취해야 할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과실로 A씨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약물 투여로 가슴 통증과 호흡곤란이 오는 경우 환자의 호흡, 맥박, 혈압 등 활력 징후를 측정하고 산소를 공급하는 등의 조치를 하면서 환자의 상태를 관찰하고 응급조치를 해야 하며 필요 시 119구급대를 불러 의료진을 동반해 환자를 상급병원으로 안전하게 이송될 수 있도록 조치를 해야 한다고 했다.



1심에서는 원고가 일부 승소했고, 2심에서는 항소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피고가 망인의 경과를 관찰하고 119에 신고하는 등 구급차로 망인을 F병원에 이송했다고 하더라도, 망인이 F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심정지가 발생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등의 이유로 피고의 잘못으로 인해 망인이 사망했다는 원고들의 주장을 배척했다.

하지만 “피고가 망인에게 호흡곤란이 발생했을 때 망인의 혈압, 맥박, 호흡수 등을 측정하지 않았고, 망인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관찰하지 않았으며, 택시를 불러 망인이 즉시 탑승할 수 있게 하거나 구급차를 호출하는 등의 방법으로 이송 과정에 관여하지 않은 행위는 일반인의 처지에서 수인한도를 넘어설 만큼 현저하게 불성실한 진료를 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피고가 한 일련의 행위가 객관적으로 망인의 사망을 야기하거나 방치하는 것이 아니었음은 별론, 적어도 일반인은 피고의 행위로 망인이 사망했을 것이라고 합리적 의심을 할 수 있고, 이는 궁극적으로 의료 전반에 대한 신뢰를 낮출 수 있다”면서 “피고의 조치로 인해 망인이나 그 가족들인 원고들이 정신적 고통을 받았을 것임은 경험칙상 분명하므로, 피고는 위자료로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원심 판단에는 의료사고의 과실과 손해배상 책임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봤다.

대법원은 “수인한도를 넘는 현저히 불성실한 진료로 인한 위자료는 환자에게 발생한 신체상 손해의 발생 또는 확대와 관련된 정신적 고통을 위자하는 것이 아니라 불성실한 진료 그 자체로 인해 발생한 정신적 고통을 위자하기 위한 것”이라며 “따라서 불성실한 진료로 인해 이미 발생한 정신적 고통이 중대해 진료 후 신체상 손해가 발생하지 않더라도 별도의 위자료를 인정하는 것이 사회통념상 마땅한 정도에 이르러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 사건에서 망인이 피고 의원에 내원했다가 주사를 투여받은 후 전원 권고를 받고 피고 의원을 부축받아 걸어 나왔다면, 원심이 들고 있는 것처럼 망인의 혈압 등을 측정하지 않았다거나 이송 과정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는 행위만으로 피고가 일반인의 수인한도를 넘어설 만큼 현저하게 불성실한 진료를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