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오마이뉴스 기자
2005.08.12 21:10:43
[박철언 회고록 ①] 박철언 눈에 비친 총수들의 이미지... 이건희, 청탁 안해
[오마이뉴스 제공] 박철언 전 의원의 5·6공화국 정치 비사를 담은 회고록이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당시 재벌과 정치권과의 유착관계도 새삼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회고록에 드러난 일부 재벌총수의 경우 여야 정치권을 넘나들면서 정치자금을 제공하거나, 구체적인 정치현안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는 등 정경유착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번 회고록에서 가장 주요하게 등장하는 재벌총수는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이다. 박 전 의원은 신 회장과 국내 뿐 아니라 일본 등지에서 수차례 만나면서, 정치권 동향과 정국 운영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 신격호 회장 : YS와 화해 권유부터 북의 전쟁가능성까지 언급
특히 90년 3당 합당을 전후로 신 회장은 여당은 물론 YS와 DJ 등 야당 정치인까지 넘나들면서 활발한 접촉을 벌였다.
박 전 의원은 회고록에서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신격호 회장과 YS는 오래전부터 가까운 사이다. 자금 지원도 상당히 해주고 있는 듯하고 깊은 대화를 나눈다. 신 회장을 자주 만나 올바른 정보도 파악하고, YS에게 합당을 권유하도록 부탁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밝혔다.
그는 또 "신 회장은 정계개편이 되어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고, 변화무쌍한 YS의 마음을 합당으로 돌리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줬다"라고 책에서 전하고 있다.
이어 3당 합당 직전인 89년말께. 신 회장은 박 전 의원을 만나 보다 구체적인 정국 구상을 전달한다. '앞으로 내각제 개헌을 통해 김영삼씨가 수상, 김종필씨가 대통령을 하고 그 다음에는 민정당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 회고록을 통해 드러난 신 회장의 구상이다. 물론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또 90년 9월 4일 소련 방문을 마치고 도쿄로 돌아온 박 전 의원은 7일 도쿄 가와사키호텔에서 신 회장을 만난다. 이 자리에서 그는 신 회장으로부터 "관대한 마음으로 YS와 화해하라"는 이야기를 종용받았다고 회고했다.
한 달 후인 10월 3일께. 박 전 의원은 신 회장과 다시 만난다. 신 회장은 전날인 2일 점심과 저녁시간에 이미 DJ와 YS를 연이어 만났었다. 신 회장은 박 전의원에게 "YS가 박 전 의원(당시 정무장관)과의 관계 개선을 바라고 있다", "박 전 의원의 협조 없이는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는 것 같았다"는 말을 전했다.
신 회장은 또 "북한이 급격하게 개방돼 김일성이 궁지에 몰리면 미국과 남한측의 북침을 가장하여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도 있으니 유의하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 이건희 회장 : 이권 청탁이나 정치자금 건넨 적 없었다
이건희 삼성 회장에 대해서는, 박 전 의원은 "(이 회장이) 한번도 이권과 관련된 부탁을 한 일 없고, 정치자금 지원 같은 것도 벌이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힘든 야당의 길을 걷는 동안에도 공개 행사장에서 가끔 반갑게 얼굴을 마주하는 정도지만 매우 좋은 느낌을 가지고 있다"고 적었다.
박 전 의원이 이 회장을 처음 만난 때는 지난 71년 무렵. 이건희 회장은 당시 동양방송 이사였다. 이 회장을 중간에서 연결한 사람은 당시 삼성그룹 고문변호사였던 인형무씨. 인 변호사는 서울대 문리대 출신으로 박 전의원과는 61학번 동기였다. 이후 박 전 의원은 이 회장과 80년부터 91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만났다고 전했다.
그는 "80년부터 91년까지 셋이서 또는 이 회장과 둘이서 신라호텔 로열스위트룸이나 개인 영빈관 등지에서 식사를 하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했다"고 썼다. 이어 소탈하고 직선적인 성격인 이 회장의 세계정세 분석과 미래전망, 정치방향과 경제흐름에 관한 의견은 상당히 도움이 됐다고 박 전 의원은 밝혔다.
이 회장과 30여년동안 새해 카드를 주고 받고, 명절이면 (이 회장으로부터) 한과나 포도주를 받았다는 박 전 의원은 지난해 둘째 딸 상영씨 결혼식때 이 회장에게서 축하금 100만원을 받았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 김우중 회장 : 직원 50명이 몇백번 회식할 정치자금 전달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을 만난 부분도 잘 묘사돼 있다. 지난 88년 4월26일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박 전 의원은 힐튼호텔 23층 펜트하우스에서 김 전 회장을 만났다.
박 전 의원은 "(김 전 회장으로부터) 별다른 부탁 없이 6공화국이 잘돼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자리를 일어나면서 직원들 회식하라며 봉투 하나를 주길래, 몇차례 거절하다가 성의상 받아왔다"고 적었다.
그는 이어 "청와대 사무실로 돌아와 봉투를 열어보니 직원 50여명이 회식을 몇 백번하고도 남을 큰 돈이어서 어처구니 없었다"면서, 이후 김 전 회장을 다시 만나 봉투를 되돌려 주려고 했지만 '나라를 운영하려면 자금이 들텐데... 아무 조건없이 도와드리는 것'이라며 김 전 회장이 한사코 만류했다고 회고했다.
박 전 의원이 다시 "자신은 경제정책에 관여하지 않고 있으며, 이런 큰 돈을 받으면 김 회장과 저의 관계가 이것으로 끝난다"고 하자, "정치인들을 많이 도와드렸는데, 박 보좌관 같은 분은 처음"이라고 말한, 김 전 회장의 발언을 전하기도 했다.
박 전 의원은 이후 김 전 회장과 몇차례 개별적으로 만났으며, 대북정책과 공산권 문제 해결과정에서 직·간접적인 도움을 받았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