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브레튼우즈 논의심화..유럽 경제패권 `야심`
by김윤경 기자
2008.10.16 16:10:17
리먼 파산이후 美 자본주의 회의론 심화
英 총리 新 브레튼우즈 체제 필요성 역설
유럽, 세계 경제체제 패권 야심
[이데일리 김윤경기자] 서브프라임발(發) 금융위기로 전세계 경제 체제가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상징 미국의 패권은 확실히 뿌리채 흔들렸다. 그리고 그 사이 유럽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특히 신속한 공적자금 투입을 통한 국유화란 영국식 은행권 지원 방식이 유럽은 물론, 미국에까지 원용되면서 이런 목소리의 중심엔 영국이 서 있게 됐다.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는 연일 새로운 경제 체제의 설립을 역설하고 있다.
자유를 구가했으나 결국 그 덫에 빠진 전세계 금융 시장을 감독하고 규제할 수 있는 강력한 체제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폐허가 된 세계 경제를 살리는데 일조했던 브레튼우즈 체제(Bretton Woods system) 같은 체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세를 얻고 있다.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후 미국식 자본주의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고 있는 유럽의 속내는 이를 통해 경제 패권을 움켜쥐려는 것일 수도 있다.
브라운 총리는 신 브레튼우즈 체제의 필요성을 최근 재차 역설하고 있다. 15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이틀 일정으로 열린 유럽연합(EU) 정상회담에서도 같은 주장을 했다.
그는 "국가, 지역에 국한한 규제와 감시 체제만 있고, 전세계 금융 시장의 리스크를 감독할 체제가 없다"고 지적하고 범세계인 경제 체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금융 부문의 붕괴가 재현되지 않도록 전세계적인 조기 경보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모든 나라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규제 기준을 만들어야 하며, 다국적 기업에 대한 국경을 넘는 강력한 감독도 마련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국제통화기금(IMF)은 근대 모델이라면서 전세계 금융 시장을 모니터하고 조기 경보 시스템을 작동할 수 있는 새로운 기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브라운 총리의 주장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1998년 아시아 외환위기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그는 같은 제안을 한 바 있다. 그러나 당시엔 묻혔던 이 주장이 영국식 은행 구제안이 부각되면서 덩달아 재조명을 받고 있다.
은행들의 부실채권은 사줘도 절대 직접 자금을 대주는 구제는 안하겠다고 버티던 미국마저도 영국식 지원 방식을 따르게 되면서 불과 한 달전까지만 해도 퇴진 압력을 받던 브라운 총리의 파워가 막강해진 까닭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같은 논의가 EU 순회 의장국인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호세 마누엘 바로소 EU 집행위원장 등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을 만나러 미국을 방문하는 오는 18일 논의될 것이라고 전했다.
유럽 정상, 그리고 중앙은행 총재들은 대개 브라운 총리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세계 경제에서 미국의 리더십이 부재하고 있다는 지적도 서슴지 않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IMF만이 세계 금융 시스템을 감시할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장 클로드 트리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금융 시장은 확실히 기강(discipline)을 원하고 있다"며 마치 1944년 브레튼우즈 회의에서 IMF와 국제부흥은행(IBRD) 설립이 협의되었던 것을 상기하듯 "전세계는 처음 브레튼 우즈로, 기강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틀째 열릴 16일 EU 정상회의에선 더 구체적인 방안이 제시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전세계 30개 금융사들을 감독할 기구를 만들자는 제안이 이날 나올 것이라고 보도했다. 지난 12일 마련된 영국과 15개 유로존 국가의 긴급 회담에서 만들어진 원칙에 행동계획(action plan)이 담겨질 것이란 전망이다. 이는 물론 유럽에 국한되는 제안이 아니라고 WSJ이 성명서 초안을 인용해 보도했다.
그러나 이들이 이를 행동에 옮기도록 하는 것은 다른 문제일 수 있다. 1944년에 비해 현재의 세계 경제와 금융시장의 구조는 복잡해졌다. 규제의 범위나 기준, 주체에 대한 논란이 벌써부터 제기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위기 감독 외에 통화 체제와 관련해서도 논의가 있을 지 관심사이지만 브라운 총리 등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바는 없다.
지난 1983년 5월 당시 프랑수와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선진국 정상회담을 앞두고 신브레튼우즈 체제 확립을 고려해야할 필요가 있다며 미국 달러와 일본 엔, 유럽통화를 링크해 당시 유럽통화제도(EMS)와 같은 체제를 만든다는 구상을 내놨지만 논의만 됐을 뿐 결과물은 없었다
또한 이번 신 브레튼우즈 체제 설립 주장은 유럽이 경제 헤게모니를 쥐려는 야심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동안 실질적으로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해 온 미국에 대한 비판을 넘어 세계 경제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쥐어지느냐는 매우 민감하고도 중차대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달러 기준 고정환율제와 IMF와 같은 체제 유지를 위해 필요한 기구가 마련된 브레튼우즈 체제를 통해 미국 중심의 세계 경제, 즉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를 견고히 만드는 결과가 초래된 이면도 있었다.
따라서 아직까지 이렇다할 공식 반응을 보이고 있지 않은 미국의 향후 입장 표명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