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조달러 스테이블코인 결제 혁명에서 한국만 소외됐다

by최훈길 기자
2026.04.22 06:33:01

스테이블코인 디지털자산기본법 입법 공백 <3>
윤현근 대표 “결제 인프라 60년 패러다임 개편”
스테이블코인 없이 AI 경제 완성될 수 없어
글로벌 결제 레일 굳어지는데 법 실종 문제
입법 늦어질수록 韓 입지·주도권 모두 상실

[윤현근 INSIGHT3 Inc. 대표이사] 33조달러(이하 21일 기준 4경8470조원). 비자(Visa)를 넘어선 새로운 결제 레일이 깔리고 있다. 지난해 한 해 동안 스테이블코인으로 처리된 거래 규모가 33조달러를 기록했다. 전년 대비 72% 증가한 수치이며, 같은 기간 비자의 처리 규모 16조7000억달러의 약 2배에 해당한다. 60년 동안 구축해 온 세계 최대 결제 네트워크를 불과 수 년 만에 블록체인 위의 디지털 달러가 추월한 것이다.

물론 이 33조달러에는 거래소 간 유동성 이동, 차익거래, 자동화된 블록체인 활동 등 ‘순수 결제’가 아닌 거래도 포함돼 있다. 이를 감안해 맥킨지와 아르테미스 애널리틱스가 공동으로 산출한 B2B, P2P, 크로스보더 결제 등 실질 결제 규모는 연간 약 3900억달러로 전체의 약 1%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1%’조차 매년 7배 이상 성장하고 있으며 기업 간(B2B) 결제만 월 60억달러를 넘어섰다. 2년 전 대비 30배 증가한 수치다. 블룸버그 인텔리전스(Bloomberg Intelligence)는 2030년까지 스테이블코인 결제 총량이 56조달러(8경2208조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것은 더 이상 ‘가상자산 시장 내부’의 이야기가 아니다. 결제와 정산의 기본 문법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사진=챗GPT)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이 혁명을 주도하는 주체가 크립토 스타트업이 아니라 기존 결제 인프라의 지배자들이라는 점이다. 지난 3월 마스터카드(Mastercard)는 스테이블코인 결제 인프라 기업 BVNK를 최대 18억달러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BVNK는 130개국 이상에서 연간 300억달러의 스테이블코인 결제를 처리하며, 월드페이(Worldpay)·딜(Deel)·플라이와이어(Flywire) 등 글로벌 핀테크 대형 고객사를 보유하고 있다. 매출 대비 약 45배의 밸류에이션으로 마스터카드가 스테이블코인 결제 레일의 미래에 걸고 있는 확신의 크기를 보여준다.

비자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작년 말 USDC 기반 정산을 미국 내에서 정식 개시했으며, 기존 영업일 5일 체계를 넘어 주 7일 정산 체계를 구축했다. 스테이블코인 연계 카드 지출은 2025 회계연도 4분기 기준 연환산 35억달러로, 전년 대비 460% 성장했다.

비자의 아시아태평양 디지털 커런시 총괄은 “스테이블코인은 결제와 정산을 동시에 처리하는 새로운 구조를 통해 글로벌 자금 이동 방식을 재정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스트라이프(Stripe)는 34개국 쇼피파이(Shopify) 가맹점에 USDC 결제 수락 기능을 제공하고, 100개국에 스테이블코인 기반 금융계좌 서비스를 출시했다.

페이팔(PayPal)은 자체 스테이블코인 PYUSD의 사용 체인을 솔라나로 확장해 수수료 절감과 속도 개선을 꾀하고 있다. 월마트와 아마존도 카드 수수료 절감 수단으로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 도입을 검토 중이다.

이들이 움직이는 이유는 단순하다. 기존 카드 결제 시스템은 결제와 정산 사이에 1~3영업일의 시차가 있고, 크로스보더 결제에는 수수료와 환전 비용이 추가된다. 스테이블코인은 이 구조를 ‘결제=정산’으로 단축한다. 24시간 365일, 국경 없이, 수초 내에 완결된다. 결제 인프라의 60년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결제 혁명이 더 급박해지는 이유가 있다. AI 에이전트 경제가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샘 올트먼이 이끄는 월드 프로젝트는 코인베이스의 x402 프로토콜과 통합한 에이전트키트(AgentKit) 베타를 출시했다. AI 에이전트가 자율적으로 상거래를 수행할 때 거래 주체가 실제 인간임을 월드 아이디로 검증하는 메커니즘이다. 현재 월드 아이디 인증을 완료한 사용자는 1791만명에 달한다. 코인데스크는 에이전트 상거래 시장 규모가 2030년까지 3조~5조달러에 이르고, 미국 이커머스의 25%를 차지할 것으로 전망했다.

AI 에이전트가 실제 경제 활동을 수행하려면 ‘프로그래머블 머니’(조건에 따라 자동으로 거래가 실행되는 디지털 화폐)가 필수적이다. 기존 카드 결제나 은행 이체로는 AI 에이전트 간의 실시간 자율 거래를 처리할 수 없다. 스테이블코인과 스마트 컨트랙트가 결합된 결제 레일만이 이 수요를 감당할 수 있다.

정부가 AI 산업을 국가 핵심 육성 분야로 투자하면서도 AI 에이전트가 사용할 결제 인프라에 대한 논의는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AI 경제의 절반은 결제 레일이다. 스테이블코인 없이 AI 경제는 완성될 수 없다.

민주당 디지털자산태스크포스(TF) 위원장인 이정문 의원(가운데)과 민병덕 의원(맨왼쪽), 박민규 의원(맨오른쪽) 이 16일 서울 여의도 소통관에서 기자회견 직후 기자들과 만나 27일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소위에 디지털자산기본법 법안이 상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민주당 정책위원회와 정부는 5월 원구성 일정 등을 고려해 법안 상정을 늦춰도 된다는 입장이어서 27일 법안 상정이 불투명하다. 현재 국회에는 민병덕·이강일·박상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디지털자산 종합법안과 안도걸·김현정 민주당 의원 및 김은혜 국민의힘 의원의 스테이블코인 특화 법안, 지난 9일 발의된 김성원 국민의힘 의원의 가상자산기본법 제정안 등 총 7건이 계류 중이다.(사진=이데일리 최훈길 기자)


한국도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속도의 차이가 문제다. 지난 9일 신한카드는 스테이블코인 기반 결제 개념검증(PoC)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솔라나·파이어블록스·비자·마스터카드 등 글로벌 기업과 파트너십을 맺고, P2P 결제·크로스보더 송금·하이브리드 카드·프로그래머블 머니 등 6개 핵심 과제를 검증했다. 의미 있는 첫 걸음이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하다. 한국 금융권의 스테이블코인 대응은 ‘상표권 출원’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시중은행과 인터넷 은행, 핀테크 업체 등이 앞다퉈 스테이블코인 관련 상표권을 출원하고 있지만, 정작 코인 발행을 위한 기술적 준비와 이를 활용한 수익 사업 모델은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상표권 등록에만 1년 이상 걸리는데 발행 기술과 사업 모델 준비는 그에도 미치지 못한다.

더 뼈아픈 것은 정책 논의 자체가 공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1월 9일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금융위는 디지털자산 2단계 입법을 올해 1분기 주요 추진과제로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2월 미·이란 전쟁 발발과 6월 지방선거 변수가 겹치며 당정협의는 무기한 연기됐고, 민주당 디지털자산TF는 오는 27일 법안심사1소위원회를 열어 공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다만 정부와 민주당 정책위는 여전히 6월 지방선거 이후 하반기 논의를 선호하고 있어, 27일 소위는 여당측의 드라이브와 정부의 신중론이 공개 충돌하는 무대가 될 전망이다.



관련해 김상훈 국민의힘 의원(주식·디지털자산 밸류업 특위 위원장)은 지난 17일 한국상사판례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 “제도화가 시급한 시점에 대주주 지분 제한과 같은 지배구조 이슈가 갑작스럽게 논의의 중심을 차지하며, 정작 법안의 핵심인 시장 안정과 혁신 지원이라는 본질적 논의가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금융위원회의 15~20% 일률적 디지털자산거래소 대주주 규제가 시행되면 두나무(업비트), 빗썸, 코인원, 코빗, 스트리미(고팍스) 등 5대 거래소의 대주주 지분을 매각해야 한다. 지분율 제한은 두나무와 코빗 인수를 각각 추진하는 네이버와 미래에셋에도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민주당이 촉구하는 예외 조항이 포함될지 여부에 따라 지분 매각 여부나 수준, 시점이 달라질 전망이다. (자료=각 사 및 업계 추정)
현행 자본시장법상 대체거래소 수준인 15~20%로 가상자산 거래소의 대주주 지분을 제한하겠다는 논의가 작년 12월 갑자기 본류를 잠식했다. 국회입법조사처도 김상훈 의원실에 제출한 공식 보고서에서 이 규제가 재산권(헌법 제23조)·직업의 자유 및 기업활동의 자유(헌법 제15조)·소급입법 금지 원칙(헌법 제13조)과 충돌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글로벌 경쟁사는 결제 레일을 깔고 있는데, 한국은 자국 산업의 지분 구조를 놓고 다투고 있다.

근본적인 문제는 법의 부재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발행 근거가 되는 법률이 없다. 국회에는 관련 법안 7건이 계류 중이지만, 발행 주체(은행 51% 룰), 준비자산 규율, 발행 구조 등 핵심 쟁점에 대한 합의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법이 없으니 사업자는 준비할 수 없고, 준비할 수 없으니 기술은 쌓이지 않는다. 기술이 없으니 글로벌 경쟁에서 출발선에 설 수 없다. 이 악순환이 계속되는 동안 밖에서는 33조달러의 결제 레일이 굳어지고 있다.

아시아에서도 한국의 부재가 두드러진다. 맥킨지·아르테미스 분석에 따르면 스테이블코인 결제의 60%가 아시아 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다. 인도네시아·베트남·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인플레이션 (hedge), 크로스보더 결제 수단으로 스테이블코인을 적극 활용하는 가운데 한국은 제도적 공백 속에 이 흐름에서 빠져 있다.

그 사이 한국 결제시장은 이미 달러 스테이블코인에 잠식되기 시작했다. 결제기업 다날은 서클·바이낸스 페이와 손잡고 방한 외국인 대상 USDC 결제 서비스를 준비 중이다. 비씨카드는 코인베이스와 USDC 결제 기술을 실증하고 있다. 하나카드도 외국인이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충전한 카드로 국내 가맹점에서 결제할 수 있도록 마케팅을 추진 중이다. 제도가 공백인 사이 한국 가맹점에서 결제되는 ‘달러’가 먼저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신현송 신임 한국은행 총재가 21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별관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신중하고 유연한 통화정책 운영을 통해 물가안정과 금융안정을 도모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취임사에서 스테이블코인과 관련한 언급은 없었다. 앞서 신 총재는 지난 15일 인사청문회에서 “미래의 통화 생태계 내에서 원화 스테이블 코인도 (CBDC와) 보완적 경쟁적으로 공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이데일리 방인권 기자)


결제 인프라의 특성은 ‘경로 의존성(path dependency)’이다. 한 번 자리 잡은 결제 흐름은 규제가 정비된 뒤에도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해외 이전 금액이 반기 기준 101조6000억원에 달하는 현 상황에서 국내 사용자의 결제 경험과 유동성은 이미 외부 인프라 위에 쌓이고 있다.

미국은 지니어스 액트(GENIUS Act)로 법적 기반을 완성하고, 비자·마스터카드가 결제 레일을 전환하고 있다. 일본은 금융상품거래법 개정안을 각의에서 의결하며 암호자산을 금융상품으로 재분류했다. 유럽연합(EU)는 미카(MiCA)를 시행하고 있다. 이 나라들에서 스테이블코인 결제 인프라가 표준으로 자리 잡은 뒤, 뒤늦게 등장하는 한국의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선택지’가 될 수 있을까. ‘대안 중 하나’로 밀려날 가능성이 훨씬 크다.

33조달러는 숫자가 아니다. 결제 질서가 재편되고 있다는 신호이며, 이 재편에 참여하지 않으면 주도할 수 없다는 경고다. 금융당국의 고민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고민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한국이 참여할 수 있는 자리는 줄어든다.

지난 20일 국회 재정경제기획위원회는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 후보자의 인사청문 경과보고서를 채택했다. 신 후보자는 21일 취임했다. 국제결제은행(BIS) 통화경제국장 출신으로 그간 스테이블코인에 가장 신중한 목소리로 꼽혔던 신 총재는 청문회에서 “미래 통화 생태계 내에서 원화 스테이블코인도 보완·경쟁적으로 공존할 수 있을 것”이라며 “디지털화폐 생태계 조성에 힘쓰겠다”고 밝혔다. 그간 한국은행의 엄격한 신중론에 막혔던 논의의 문턱이 낮아진 셈이다. 시장이 이를 입법의 ‘청신호’로 받아들이는 이유다.

더불어민주당 디지털자산태스크포스(TF) 민병덕 의원은 지난 17일 국회 세미나에서 “우리에게 가장 큰 위험은 달러라이제이션(dollarization)이며, 달러의 식민지가 돼 우리 원화가 전혀 기능 못하는 게 가장 큰 위험”이라며 “해법은 장벽을 세우는 게 아니라 이 쓰나미에 올라타고 우리 경제 영토를 넓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진단이다. 관객으로 남으면 달러의 디지털 식민지가 되고, 참여자가 되면 경제 영토를 넓힐 수 있다.

마스터카드는 18억달러를 걸었다. 비자는 365일 정산 체계를 구축했다. AI 에이전트는 프로그래머블 머니를 기다리고 있다. 한국의 1113만 투자자와 금융 산업은 이 33조달러 혁명에서 관객이 아니라 참여자가 돼야 한다. 오는 27일 법안소위가 그 분기점이다. 그러려면 지금, 법이 필요하다.

윤현근 INSIGHT3 Inc. 대표이사. (사진=윤현근 대표이사 제공)




: 스테이블코인 디지털자산기본법 입법 공백 <1> 김태림 AXIS Law 대표변호사·한국웹3블록체인협회 사무총장



: 오늘 한은 총재 후보 청문회 기대 이유 <2> 티모시 신 INSIGHT3 Inc. 창립 파트너·미국 변호사



:결제 인프라 60년 패러다임 개편 <3> 윤현근 INSIGHT3 Inc.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