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 보낸 고종의 '외교선물', 127년 만에 첫 공개

by이윤정 기자
2023.02.08 11:17:05

'흑칠나전이층농' '고사인물도' 등
조선의 공예 정수 보여주는 유물
크렘린박물관 특별전서 첫선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고종(1852~1919)이 러시아 니콜라이 황제 2세 대관식에 전달했던 외교선물이 127년 만에 처음 공개된다.

8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흑칠나전이층농’, 장승업 ‘고사인물도’ ‘백동향로’ 등 고종의 외교선물을 오는 2월 9일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박물관 특별전 개막식을 통해 처음 공개한다고 밝혔다.

백동향로(사진=국외소재문화재재단)
장승업의 ‘고사인물도’(왼쪽부터), 흑칠나전이층농, 백동향로(사진=국외소재문화재재단).
크렘린박물관이 이번 특별전 ‘한국과 무기고, 마지막 황제 대관식 선물의 역사’에 출품한 유물들은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이 러시아 니콜라이 황제2세 대관식(1896년 5월 26일)을 맞아 민영환(1861~1905)을 전권공사로 파견해 전달한 ‘외교선물’ 가운데 일부다. 고종이 전달한 선물들은 민영환을 수행해 대관식에 함께 참석했던 윤치호의 일기를 통해 그 목록의 일부가 언급된 바는 있었지만, 구체적인 실물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특별전 전시과정에서 1896년 고종이 전달한 선물은 총 17점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특별전 출품작은 ‘흑칠나전이층농’ 1점, 장승업 ‘고사인물도’ 2점, ‘백동향로’ 2점 등 총 5점이며 이는 모두 크렘린박물관 소장품들이다. 그밖에 나머지 선물들은 모스크바 국립동양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고종의 선물들 가운데 현재 크렘린박물관 소장품은 “19세기 수준 높은 조선 공예 및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중요 유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흑칠나전이층농’의 경우 고종의 특명에 의해 당대에 가장 뛰어난 나전 장인이 제작한 작품으로 추정돼 더욱 주목할 만하다. 농 하단부에 나전 십장생(十長生)을 부착해 황제로 즉위하는 니콜라이 2세의 무병장수를 기원한 점도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공예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유물임을 보여주고 있다. 1920년 일본에서 ‘실톱’이 도입되면서 나전공예에 ‘끊음질’ 기법이 유행했는데, 그보다 30여 년 앞서 ‘흑칠나전이층농’에 이 기법이 적용된 것으로 확인됐다.

조선의 4대 화가로 꼽히는 장승업(1843~1897)의 ‘고사인물도’ 등은 지금껏 학계에 보고된 바가 없는 것이다. 크기만 174cm가 넘는 보기 드문 대작에 속한다고 평가되고 있다. 특히 장승업의 각 작품에는 ‘朝鮮(조선)’이라는 국호를 ‘吾園 張承業(오원 장승업)’ 서명 앞에 붙였다. 이는 장승업 작품 가운데 처음 확인되는 희귀사례로, 이 작품이 ‘외교선물’을 전제로 창작됐음을 잘 보여준다.

‘백동향로’는 사각과 원형의 기형이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의미하는 것으로, 황제의 치세를 표상하는 대관식의 취지를 잘 표현했다고 평가된다. 특히 길상 문자를 기준으로 직선과 유려한 곡선을 조화롭게 융합했다. 정교하게 투조한 문양은 일반적인 공예품에서 보기 힘든 복잡하고 세밀한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사각향로 몸체에 ‘향연(香煙, 향기로운 연기가 서리다)’, 둥근향로에 ‘진수영보(眞壽永寶, 참다움과 장수, 영원한 보물)’를 각각 새겨 대관식을 축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