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생각]①화폐, 권력과 전쟁의 역사

by김무연 기자
2020.09.14 11:00:00

지상 강의 : ‘인더스토리Ⅱ’ 3강 화폐(貨幣) 上
리디아의 최초 화폐, 페르시아를 통해 전 세계로 확산
중세 암흑시대 사라진 화폐, 르네상스로 부활
금본위제의 약점인 뱅크런 막기 위한 끝없는 전쟁
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으로 영국 파운드 기축통화 몰락

현대 산업사회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들의 과거와 현재를 역사·정치·문화·기술·경제 등 복합적인 시선으로 이해하고 이를 통해 미래를 보는 능력을 기른다. 현대 문명의 기반이 된 ‘철’(鐵)과 ‘사’(沙·모래)부터 코로나19 사태로 주목받고 있는 ‘약’(藥), ‘의’(醫) 등 이 세상 모든 산업의 역사를 다룬다.

미국 조지아공대에서 15년간 교수로 재직. 조지아공대 부설 전자설계연구소 부소장, 조지아공대 기업혁신센터 국제협력 수석고문. 국제 통신표준화 의장. 빅데이터·소프트웨어·게임·블록체인·기후변화 등 다양한 분야의 스타트업에 참여.

임규태 박사가 서울 중구 순화동 KG하모니홀에서 ‘위대한 생각’ 지상 강연 ‘인더스토리Ⅱ’ ‘화폐(上)’ 편을 강의하고 있다.(사진=김태형 기자)
[총괄기획=최은영 부장, 연출=권승현 PD, 정리=김무연 기자] 화폐의 역사는 어디서부터 시작했을까.

임규태 박사는 경제 인문학 토크 콘서트 ‘위대한 생각’의 대표 프로그램 ‘인더스토리’ 시즌2의 주제로 ‘금융’을 정하고 ‘은’과 ‘금’에 이은 세 번째 강연에서 ‘화폐’의 역사를 이야기했다.

지금까지 확인된 인류 최초의 화폐는 기원전 2000년 세워진 리디아 왕국의 금화 ‘리디아의 사자’다. 당시는 주조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금과 은이 반반 섞인 호박금 원석 그대로 화폐를 만들었다. 이후 금과 은을 분리할 수 있게 되면서 금화와 은화가 별도로 주조된 크로이세이드가 등장했다.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 금화와 시글로스 은화
리디아의 화폐 기술이 유럽과 아시아 전역에 퍼지게 된 것은 페르시아가 리디아를 복속하면서부터이다. 기원전 546년 리디아를 정복한 키루스 2세는 리디아의 화폐인 크로이세이드를 그대로 사용했으나, 권좌를 이어받은 다리우스 1세가 다릭 금화와 시글로스 은화라는 페르시아의 독자 화폐를 발행하면서 유럽과 아시아 전역에 화폐 문명이 전파됐다.

로마 제국은 데나리우스 은화를 사용해 500년 간 번영했으나 네로 황제 시기부터 은의 함량을 줄이며 나라가 기울기 시작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솔리두스 금화를 발행해 화폐 시스템을 안정시켰지만, 동서 로마의 분열과 서로마 멸망을 거치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서로마 제국 멸망으로 중세 시대는 금욕을 중시해 기술, 문화 뿐 아니라 화폐 경제 역시 암흑기에 빠져 들었다.

유럽의 은화들. 왼쪽부터 네덜란드 달더르, 스페인의 페소 데 오초, 북유럽의 요아힘스탈러.
화폐 경제의 부활은 르네상스 시대의 시작과 궤를 같이한다. 르네상스가 과거 그리스와 로마의 유산을 복원했던 것처럼 화폐 경제 역시 페르시아와 로마가 사용했던 은화의 부활로 시작됐다. 1486년 독일의 요아힘스탈 지역 은광에서 채굴한 은으로 주조한 은화인 요아힘스탈러가 인기를 얻는다.

은화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실물화폐였기 때문에 누구나 양질의 은만 있으면 화폐를 발행할 수 있었다. 이에 유럽 각지의 은광마다 지역 명칭을 딴 은화들이 경쟁적으로 주조되고 유통되었다. 은광은 곧 부와 권력을 의미했으니 북유럽뿐 아니라 서유럽, 남유럽으로 확장됐다. 1497년 스페인의 페소 데 오초, 1576년 네덜란드의 달더르 은화가 차례로 등장했다. 당시 유럽 지역에서 통용되던 은화들을 통칭해 ‘탈러’라 불렀다.

대항해 시대에 남미를 식민지화한 스페인은 볼리비아 포토시 은광을 발견하고 대량의 은화를 주조해 유통시킨다. 스페인이 남미에서 생산한 은화는 ‘스페인 달러’로 불리며 유럽뿐 아니라 전 세계로 유통됐고, 대항해 시대에 은 기축통화 시대를 열었다. 스페인과 해상 패권을 양분하던 네덜란드는 일본의 이와미 은광에서 독점한 은으로 주조한 달더르 은화를 유통시켰다. 스페인과 네덜란드 은화는 다량으로 신대륙으로 흘러들었고 이는 미국 ‘달러’의 기원이 된다.

네덜란드와 연합해 가톨릭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물리친 영국은 해상 패권을 두고 네덜란드와 결별을 선택했다.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은 영국 관련 무역은 영국 국적의 선박만 이용하도록 강제하는 항해조례를 발표해 네덜란드의 반발을 샀다. 결국 양국 간에 전쟁이 벌어졌고, 이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해상패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후 영국이 금본위제를 채택하면서 세계 무역의 기축통화가 은에서 금으로 바뀌게 된다.

영란은행.
1694년 설립한 영란은행은 금보관증 제도를 바탕으로 막대한 양의 통화를 시장에 공급했다. 금보관증은 금 보유자가 은행에 금을 맡긴 뒤 받는 보증서로 현대 화폐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영란은행은 금 보관증을 소유한 사람이 금을 찾으러 은행을 방문할 일이 거의 없다는 점에 착안해 금 한 덩이에 10장의 보관증을 발행하는 기법을 도입했다. 이른 바 ‘10%의 마법’이다. 이후 미국 등 다른 국가들도 금 보관증을 바탕으로 한 금본위제를 채택한다.

10%의 마법으로 영란은행은 실제 금 보유고의 10배가 넘는 화폐를 발행하며 부를 창출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제도에는 치명적 약점이 있었다. 모든 금 보유자가 일시에 은행으로부터 금 상환을 요구할 경우다. 은행으로선 금 보유고가 발행한 보관증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상환 요구에 응할 수 없는 ‘뱅크런’ 현상이 발생한다. 역으로 뱅크런만 억제한다면 금 보관증 제도는 10배가 넘는 레버리지로 국부를 창출할 수 있었다.

결국 유럽 열강은 뱅크런을 막기 위해 식민지와 전쟁이라는 두 가지 해법을 찾아냈다. 식민지 개발에 막대한 자본이 필요했고 전쟁을 벌이면 전비를 지속적으로 소모해야 해 다량의 통화를 찍어내도 본국 은행에 상환 요청이 들어올 가능성이 적다는 점을 노린 전략이었다.

실제로 영란은행이 탄생한 뒤 영국은 스페인 왕위계승전,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 프렌치-인디안 전쟁, 미국 독립전쟁, 나폴레옹 전쟁, 아편전쟁 등 꾸준히 전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전비 지출 유혹에 빠진 유럽 각 국이 참여하면서 전쟁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게 된다. 결국 이들이 폭주 끝에 다다른 끝판 전쟁이 바로 ‘1차 세계대전’이다.

대공황 당시 미국 사진.
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 중세 봉건 왕정은 몰락했다. 유럽은 단순히 정치 체제의 변화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1차 세계대전은 급속히 발달한 과학기술로 대량 살상이 가능해 인력 손실이 극심했다. 군인만 참전하던 과거 전쟁과는 달리 일반 주민들까지 전시 물자 생산에 동원하는 총력전 개념을 도입하면서 사실상 국가 경제가 마비됐다.

여기에 각국의 이해관계와 계속된 참호전으로 전쟁의 끝을 가늠할 수 없었다. 전쟁 후 유럽은 승전국이든 패전국이든 경제적 파탄을 피할 수 없었다.

단 미국은 예외였다. 미국은 먼로주의를 주창하며 전쟁에 관여하지 않았다. 대신 1차 세계대전 기간 내내 영국과 프랑스 등에 무기와 전쟁 물자를 공급하면서 막대한 부를 쌓았다.

전후 무너진 영국 경제를 살리기 위해 재무장관으로 등판한 인물이 윈스턴 처칠이다. 처칠은 전쟁 기간 동안 일시적으로 중단했던 금본위제를 다시 가동했다. 전비 확보를 위해 대량으로 발행해 가치가 하락한 파운드화의 위상을 살리기 위한 급진적 조치였다. 문제는 금본위제를 유지할 만큼 충분한 양의 금이 없었다는 사실. 처칠은 가장 금을 많이 보유한 미국을 압박해 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1차 세계대전 막판에 참전하면서 새로운 패권국으로 떠오르는 미국은 영국의 강압적 금 회수 조치에 응할 마음이 없었다. 때마침 1929년 대공황까지 발생하자 미국은 금 반출을 전격 중단한다. 미국발(發) 금 반출이 막히면서 영국을 포함한 유럽 각국은 금 부족 사태를 겪었으며 연쇄적으로 뱅크런이 발생했다. 결국 영국은 1931년 금본위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급해진 영국은 전 세계로 번지는 대공황을 막기 위해 파운드 기축통화를 포기하고 영 연방 블록 경제를 추진한다.

영국, 호주, 캐나다, 남아공, 뉴질랜드 등으로 구성한 영연방 경제 블록은 연방 내 국가 간 관세를 없애고, 연방 이외 국가에는 고관세를 매겼다. 대공황과 금본위제 붕괴가 촉발한 무역전쟁의 시작이었다.

이에 반발한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3년 금본위제를 포기하고 개인 소유 금을 연방준비위원회로 강제 회수하는 강력한 조치를 취한다. 신흥 강국 미국이 기축통화국이던 영국을 넘어 서구 최강국으로 발돋움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