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이종석 기자
2007.12.03 16:35:17
무리한 금융대출로 쌓아올린 모래성
97년 대기업 연쇄부도 신호탄
[이데일리 이종석기자] 96년 3월11일. 서울 서소문 한보건설 빌딩 16층 회장실.
“철강사업에는 모두 4조3000억원이 투자될 예정이며, 이 가운데 3조원은 이미 투자가 끝났고 나머지 투자금액 조달에도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바로 전날(10일) 한보그룹 제2대 회장으로 취임한 정보근 회장이 기자간담회를 갖고 있었다. 정 회장은 향후 당진제철소 투자과정에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점을 애써 강조했다.
그러나 약관 35세의 젊은 회장이 밝힌 당찬 포부와 자신감은 불과 1년이 못돼 한낱 물거품으로 사그라져 버리고 만다.
온갖 의혹과 질시 속에서도 늠름하게 버티던 한보철강이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은 96년 6월부터다.
당진제철소 건설에 당초 예상보다 2조원 가까이 더 많은 자금이 투입된데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철강경기마저 고꾸라지면서 그룹 주력인 한보철강은 `자금난`과 `재고누적`이라는 이중고에 허덕이기 시작했다. 워낙 막대한 자금이 투입된데다 연이은 신규기업 인수로 그룹 자금사정 역시 말이 아니었다.
이때부터 한보철강은 매일 매일 피를 말리는 어음과의 전쟁에 나서야 했고, 그룹은 그룹대로 파멸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당장 화급한 문제는 하루하루 교환에 돌아오는 어음을 막는 일이었다. 수십 수백억원대의 어음은 연일 저승사자처럼 제집을 찾아 돌아왔고, 한보그룹 자금부 직원들은 이를 막느라 자정까지 퇴근을 하지 못하는 날이 점점 늘어 갔다.
파국의 전조는 증권시장에서 부터 불거져 나왔다. 소리없이 한보 부도설이 나돌기 시작했고 증권가 정보지에는 한보 부도가 단골메뉴로 등장했다.
급기야 검찰이 나섰다. 검찰은 한보 부도설을 유포한 혐의로 바클레이즈증권 서울지점장이었던 주모씨를 소환했고, 이 같은 사실은 당시 각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한보 부도설이 공론화되는 사건이었다.
금융기관들도 난리였다. 각 은행 융자부는 매일 밤 한보철강에 자금결제를 독촉하는 전화를 걸어야 했고, 종금사 일선 부서에는 한보어음은 무조건 교환에 부치라는 밀명이 떨어졌다.
사채시장 역시 한보 파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출처불명의 인물들이 수백억원대의 한보철강 어음 뭉치를 들고와 파격적인 할인율을 제시하며 와리깡(어음할인)을 요구했다. “30%이상 할인해도 좋다. 필요하다면 세금계산서를 붙여 진성어음으로 만들어 줄 수도 있다”며 할인을 닥달했다. 평상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파격적인 조건이었지만 자금순환의 안정성을 생명으로 하는 사채꾼들이 쉽사리 받아줄리 만무했다.
한보는 그러나 저력있는 기업이었다. 어디서 구해오는 지 몰라도 회사 중역들은 쉼없이 금융권 대출을 뽑아냈고, 이는 연일 치러지는 어음과의 전쟁을 막는 일회용 총알로 소진됐다.
후일 밝혀진 사실이지만 이 자금은 정 회장이 청와대 수석과 국회의원들을 동원해 무차별적으로 끌어온 특혜 대출금이었다.
그러나 이런 노력도 한보철강이라는 거함의 침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금융권은 이미 “깨진 독에 물붓기”를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지 오래였고, 97년 1월20일 제일은행이 250억원 상당의 물품대금을 갚아준 것을 끝으로 한보철강에 대한 금융지원은 차단된다.
결과는 뻔했다. 당장 21일 돌아온 어음을 막을 길이 없었다. 그동안 밤을 새워 어음을 막아왔던 일선 자금부 직원들은 허망한 표정으로 이른 귀가길에 올라야 했다.
한세대를 풍미하며 재계의 기린아로 떠올랐던 한보의 운명은 그렇게 막을 내리고 있었다.
정태수 회장이 죽어도 잊지 못할 운명의 97년 1월23일.
그날의 상황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반전과 긴장, 경악 속에 급박하게 진행됐다.
이날 한보철강을 최종 부도처리한 금융기관대표자회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한보그룹에 대한 자금지원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자리였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드러났고, 이는 국내 기업사에 한 획을 긋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자리매김된다. 한보호가 침몰하던 그날의 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1월23일 오전 10시10분. 이세선 제일은행 전무가 기자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신광식 행장은 아침부터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다.
이 전무는 “정태수 총회장이 오늘 아침 주식담보를 제공하겠다는 입장을 통보해왔다”며 “당진제철소는 어떤 일이 있어도 완공시켜야 한다”고 서두를 열었다. 한보철강 처리가 제3자 인수 또는 은행관리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는 암시였다.
이는 97년 1월8일 제일 조흥 외환 산업은행 등 4개 채권단 행장들이 정 회장에게 제시한 ‘주식양도 및 경영권 포기요구’가 사실상 받아들여졌다는 뜻으로 한보철강 처리가 앞으로 순탄하게 진행될 수 있을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날 석간신문들은 일제히 “한보철강 은행관리 유망”이라는 제목을 시커멓게 뽑았다.
제일은행은 이후 점심시간이 막 끝난 오후 1시30분 “한보철강 처리와 관련 오늘 오후 4시에 금융기관대표자회의를 소집한다”고 채권금융기관들에게 통보했다. 대부분의 채권기관들은 이를 정 회장의 경영권 포기 이후 한보철강에 대한 구제금융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 정도로 받아들였고, 관계자들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결지인 제일은행 회의실에 모여들었다.
시간은 이미 4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대표자회의는 시작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장내가 술렁였다.
“뭔가 잘못되고 있어…” 여기저기서 우려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시각 신 행장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한보에 파견한 내부직원의 전화를 목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정 회장의 주식포기 각서를 받으러 나간 직원의 전화였다. 신 행장은 포기각서를 인수했다는 보고가 들어오는 대로 대표자회의를 시작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전혀 뜻밖의 내용이 보고됐다. 한보측 변호사가 각서를 가져오겠다고 나간 후 수시간이 되도록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좀 더 기다려보자…”
신 행장은 마음을 가다듬었지만 4시를 한참 넘기고서도 반가운 소식은 들어오지 않았다.
기업여신 업무를 담당하는 박석태 상무가 먼저 나섰다. 기자들에게 “한보측이 각서 제출을 거부한 것으로 보아도 좋다”고 전했다. 상황이 반전되는 순간이었다.
4시25분. 술렁이는 대회의실에 신 행장이 들어섰다.
“주식담보 취득을 위한 절차가 완결되지 않아 대표자회의를 무기 연기한다”
장내는 소란스러워졌고 분위기는 부도를 감지하는 쪽으로 급선회했다.
이로부터 30여분 후 김진국 한보그룹 재정본부장이 주식현물이 가득 든 007가방을 들고 신 행장을 찾았다. 주위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일순간. 김 본부장은 “주식을 제공하되 담보용이 아니며 단지 보관시키는 것일 뿐”이라며 신 행장에 보관증을 써줄 것을 요구했다. 주식담보를 생각하고 있던 신 행장은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버럭 화를 냈고, 한보와 금융단간의 마지막 협상은 그렇게 무위로 끝나고 만다.
이후 1시간여쯤이 흘렀을까. 청와대 쪽에서 한보부도를 공식확인했다는 소문이 흘러 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신 행장이 상기된 표정으로 기자회견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죄송합니다…”
이미 예감한 듯 장내는 쥐죽은 듯 고요했고 그날의 길고 길었던 5시간여의 금융기관대표자회의는 그렇게 마감됐다.
한보 부도의 파장은 치명적이었다.
한보를 시작으로 삼미, 진로, 해태, 대농 등 대기업들의 부도가 줄을 이었고, 마침내 7월15일 재계 서열 8위인 기아그룹 부도로 이어졌다.
대기업 연쇄부도는 금융기관의 과다한 외화 차입과 맞물리면서 시장에 부도 공포감을 확산시켰고, 국가신용도가 급격히 하락하면서 외국인투자가들이 자금을 일시에 철수시키는 사태로 비화됐다. 결과론적인 분석이지만 한보 부도가 초유의 외환위기를 불러오는 신호탄이었던 셈이다.
한보 부도는 정치사회적으로도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정태수 한보그룹 총회장이 공금횡령 및 뇌물수수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고, 한보로 부터 돈을 받은 정치인과 전직 은행장 등 10명이 구속됐다. 국회에서는 한보사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가 열려 58명의 증인과 4명의 참고인이 채택됐으며, 이른바 ‘정태수 리스트’에 오른 정치인 33명이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인 김현철씨와 국가안전기획부 차장이었던 김기섭씨가 이 사건에 연루돼 구속되기도 했다.
사건의 파장을 뒤로 한 채 한보철강은 이후 법정관리를 거쳐 재활의 길을 걷는다.
7년여가 흐른 2004년 3월22일. 한보철강 매각공고가 언론에 고지됐다. 총 15개 업체가 인수의향서를 제출했고. 이중 예비실사를 거쳐 최종 7개 업체가 응찰했다.
3년간 법정구속 후 출소해 있던 정태수 회장도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정 회장은 04년 5월20일 기자회견을 자청해 “나 말고는 한보철강을 살려낼 사람이 없다”며 입찰 참여 기회를 줄 것을 호소했다. 한보철강을 부도낸 장본인으로서 그는 결자해지를 원했던 듯 싶다.
정 회장은 “한보철강을 인수하면 ▲3개월안에 외자유치로 5000억원 ▲3년안에 종친회 명의로 된 땅에 아파트를 지어 얻은 수익 1조원 ▲15년간 한보철강 수익으로 매년 3000억원씩을 상환해 한보철강 부채 6조1000억원을 모두 갚겠다”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정 회장의 입찰참여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주일 후인 2004년 5월27일. 한보철강 매각 주간사인 삼일회계법인은 현대차 계열인 INI스틸-현대하이스코 컨소시엄을 한보철강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최종 선정, 발표했다.
이후 상세실사와 본계약 체결을 거쳐 한보철강은 결국 ‘INI스틸 당진공장’이라는 이름으로 재출범하게 된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한보철강 20년 드라마”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