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환의 크레딧스토리)천재들의 실패

by윤영환 기자
2009.05.07 15:21:11

[이데일리 윤영환 칼럼니스트] 서가에서 `천재들의 실패(Roger Lowenstein)`를 꺼내 먼지를 털었다. 2001년 가을에 읽었던 책이지만 LTCM 금융위기의 전개와 사후처리의 궤적을 따라 한달음에 읽어내려 갔던 기억만큼은 선명하다. 곧 이어 닥친 신용카드 위기의 전개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았던 책이 아니던가.

그 옆에는 엔론 위기에 대한 책도 두 권이 꽂혀 있다. 엔론의 파생상품사업부 신입 직원이었던 Brian Cruver가 쓴 `탐욕의 실패`와 앞서의 Lowenstein이 쓴 `버블의 기원`이다. 저자의 내공과 관점에 차이는 있지만 모두 엔론 위기를 설명하는 좋은 책들이다.

뿐만 아니라 1929년 미국 대공황에 대한 책은 수도 없이 많고, 1987년 미국의 주택대부조합(S&L) 사태와 1991년 일본의 부동산거품 붕괴(주전사태)에 대한 자료도 그리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그러나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우리나라 금융위기에 대한 백서는 본적이 없다. 직간접적으로 전말을 접했던 위기는 관련 자료를 모으는 수고만 더하면 어느 정도 재구성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최근의 위기만 가능할 뿐이다. 불과 10여년 전의 외환위기조차도 이를 제대로 재구성할 수 있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광의 역사`를 통해 애국심을 고취하는 것도 나름의 의미는 있겠지만, 더 많은 교훈을 주는 것은 `실패의 역사`다. 실패의 가능성을 줄이고 나아가 기회로 만드는 지혜가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실패의 과학인 신용분석을 업으로 삼고 있는 크레딧 애널리스트에게 실패의 역사는 통찰력을 끌어내는 지혜의 창고다. 기실 신용분석의 다양한 분석 방법론은 모두 뼈아픈 평가실패와 처절한 성찰의 반복을 거쳐 축적된 것이다.

태양 아래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고 했다. 아무리 희한한 상황도 언젠가의 실패 사례에서 그 원형을 찾아 볼 수 있다. 금융시장이 발전하면서 실패의 과정도 보다 복잡해지고 있지만 원형을 이해하고 있으면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러한 실패사례는 경력 많은 고참 애널리스트의 가장 큰 자산이다. 하지만 시장 전체로 보자면 이런 귀중한 자산을 고참 애널리스트의 기억 속에만 묻어두는 것은 사회적 낭비다. 최대한 공유할 필요가 있다. 위기 이후의 백서가 필요한 이유다.

사실 백서를 쓰는 것은 매우 어렵다. 거대한 사건을 재구성하는 것도 엄청난 일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경제와 금융시장, 그리고 신용위험에 대한 종합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백서에는 반드시 필자의 관점이 투영되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E.H. CARR의 유명한 명제를 상기해보자.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다(History is a continuous process of interaction between the historian and facts, an 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resent and the past)."

그리고 백서를 쓰는 작업은 매우 위험하다. 위기의 형성과 전개, 그리고 수습과정에는 수 많은 인물과 기업과 기관의 이해와 입장이 얽혀있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기술한다지만 당사자의 주관적인 거부감까지 피할 수는 없다. 더욱이 그들은 여전히 우리 시장의 강자들이다. 백서를 쓰기 위해서는 표현의 자유와 사회적 관용이 충분히 보장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백서를 쓰는 것은 사회적 자살 행위가 된다.

세계가 인정하는 놀라운 경제성장과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에게는 변변한 백서 하나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역량의 부재 때문인지 사회적 관용의 부족 때문인지는 판단을 유보하자. 지금은 어쨌든 이가 아니면 잇몸으로라도 실패의 지혜를 구해야 한다.

관중(管仲)의 고사에 늙은 말을 풀어 길을 찾는(老馬之智, 老馬識途, 老馬知道) 대목이 있다. 어려울 때일수록 경륜 있는 크레딧 애널리스트의 존재가치가 빛나는 법이다.

요즘 증권사들의 크레딧 애널리스트 수요가 크게 늘었다는데, 들어보면 거의 대부분 주니어만 찾는다. 역시 세상의 진보라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래도 실망하지는 않는다. 양이 늘어나면 언젠가는 질도 높아지는 법이니까.

윤영환/굿모닝신한증권/Credit analy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