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막농성 1314일만에 용산화상경마장 폐쇄…계란, 바위를 깨다

by유현욱 기자
2017.08.27 18:31:35

추방대책위 27일 마사회와 연말까지 퍠쇄 협약 체결
2103년 마사회서 성심여중고 215m 떨어진 곳에 이전 추진
주민들 대책위 꾸려 5년간 반대투쟁..청와대 중재로 해결
마사회 여론수렴 등 준비 없이 이전 강행..1200억 날릴 판
마사회 측 "소통과 화합을 이루기 위해 대승적인 결정" 밝혀

27일 오전 서울 용산구 화상경마도박장 추방농성장 앞에서 열린 화상경마도박장 폐쇄를 위한 협약식 및 승리대회에서 이양호 한국마사회장, 이학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을지로위원회 위원장), 김율옥 용산화상경마도박장 추방대책위 공동대표, 정현창 농정개혁위원회 위원장(왼쪽부터)이 용산장외발매소 폐쇄 협약서를 들고 기념촬영하고 있다.(사진=방인권 기자)
[이데일리 유현욱 기자]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며 우리의 싸움을 소용없는 일이라 말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계란이 병아리가 되어 바위를 넘듯이 우리는 거대한 마사회를 넘어 놀라운 승리를 이루었습니다.”

평범한 교사와 지역 주민, 학부모들이 손을 맞잡고 한국마사회에 맞선 지 5년. 끝이 보이지 않았던 싸움은 결국 계란이 바위를 깨트리는 기적을 연출하며 막을 내렸다.

‘용산 화상경마도박장 추방대책위원회’(대책위)는 27일 오전 마사회 등과 ‘용산 화상경마장(장외마권발매소) 폐쇄를 위한 협약식’을 체결했다. 끝이 날 것 같지 않던 지난 5년 간의 투쟁은 ‘용산 화상경마장’ 연내 폐쇄라는 결실을 거뒀다. 2013년 5월 1일 대책위를 꾸려 반대운동에 나선지 1580일, 화상경마장 앞 천막노숙농성을 시작한지 1314일째이다. 마사회로서는 지역주민들과의 사전협의 부재 등 불통의 대가로 1200억원에 달하는 투자비를 날리게 됐다.

5년 전인 2013년 봄. 성심여중·고 교사들과 학부모, 지역 주민들은 권용화 당시 용산구 구의원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성심여중·고에서 215미터 떨어진 곳에 지어진 지상 18층·지하 7층짜리 신축 건물이 마사회가 운영하는 화상경마장이라는 얘기였다.

마사회가 서울 용산역 옆에 있던 화상경마장을 서울 용산구 한강로3가에 있는 현재 자리로 확장 이전해 개장하려 한다는 소식이었다. 국내 최대 규모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교사·학부모·지역주민을 중심으로 한 대책위가 그해 5월 1일 꾸려졌다.

용산화상경마도박장추방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지난해 11월 13일 오전 서울 용산 화상경마도박장 농성장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용산 화상경마도박장을 추방해야 한다며 피켓시위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용산주민들은 반대 운동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이렇게 긴 싸움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주민 의견 수렴 절차도 없이 몰래 지어졌고 학생들 등하교 길에 위치한 화상경마장이 교육환경에 악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며 폐쇄·이전을 요구했다.

그러나 마사회는 학교보건법에서 정한 교육환경보호구역의 범위가 200m인 만큼 경계에서 15m 떨어진 곳에 지어진 화상경마장은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학생들은 청와대 게시판에 항의 글을 올렸고 주민들은 반대 서명을 모아 구청과 마사회, 농림축산식품부에 전달했다. 촛불문화제를 열었고 매일 1인 시위를 했다. 관내 다른 초·중·고교들이 연대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비난여론이 들끓었지만 마사회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2014년 1월 22일 대책위는 화상 경마도박장 건물 앞에서 천막노숙농성에 돌입했다. 국민권익위원회는 그해 6월 23일 마사회에 용산 화상경마장 이전을 철회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마사회는 닷새 뒤 임시 개장을 밀어붙였다. 급기야 6월 29일 개장 과정에서 반대 주민과 마사회 측이 물리적으로 충돌했다. 마사회는 업무방해 등 혐의로 주민 22명을 고소·고발했다. 대책위는 마사회가 경비원들을 동원해 반대 집회를 방해했다며 경비업법 위반 혐의로 마사회를 맞고발했다.



서울시의회와 용산구의회도 반대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으나 마사회는 임시개장해 1년간 운영해본 결과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며 2015년 5월 31일 정식 개장을 강행했다.



마사회가 반대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내놓은 카드도 황당했다. 마사회는 화상경마장 건물 1~7층을 지역주민들을 위한 ‘청소년 놀이시설 등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하고 키즈카페를 만들겠다고 했다. 주민들은 ‘경마장을 드나드는 사람들과 아이들을 한 건물에 같이 두겠다는 것이냐’며 어처구니없어 했다.

그간 대책위는 감사원에 두 차례 감사를 청구했고 네 차례의 형사 고발과 다섯 차례의 행정 신고를 제기했다. 또 6차례에 걸쳐 대규모 집회를 열었고 용산 주민 22만명 가운데 17만명으로부터 반대 서명을 받아 청와대 등에 제출했다.

그럼에도 해법을 찾지 못했던 화상경마자 문제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신정훈 대통령 농어업비서관이 농성장을 전격 방문하면서 사태 해결에 가속도가 붙었다.

지난 24일 대책위와 마사회, 농림축산식품부, 더불어민주당은 신 비서관의 중재로 화상경마장을 연내 폐쇄키로 뜻을 모았다.

27일 오전 서울 용산구 대책위 농성장 앞에서 열린 협약식에서 김율옥 대책위 공동대표는 “지난 5년간 화상경마도박장 추방을 위해 한여름의 폭염과 한겨울의 바람 속에서 주말을 희생하고 천막을 지켜온 모든 분께 감사하다”고 소회를 밝혔다.

이양호 마사회 회장도 “1200억원을 투자한 사업장을 폐쇄하는데 상당히 고민이 많았지만 주민들의 갈등· 분노를 해소하고 소통·화합을 이루기 위해 대승적인 결정을 했다”고 말했다.

연내 폐쇄에는 합의했지만 또 다른 갈등의 불씨는 남아 있다.

대책위는 마사회에 측에 화상 경마도박장을 매각하거나 공적 목적으로 제공할 것을 요구했다. 재개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미연에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대책위는 또 2021년 예정돼 있는 대전 월평동 화상 경마도박장도 조기 폐쇄할 것을 정부에 촉구했다. 아울러 교육·주거 환경 악화를 호소하고 있는 전국의 화상도박장을 전면 재검토해야 주장한다.

대책위 관계자는 “이번 협약식이 전국의 화상경마장으로 인한 문제에 대해 국가적 차원의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해결책이 마련되는 시발점이 되기 바란다”고 말했다.
용산화상경마도박장추방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지난 2014년 1월 22일 서울 용산구 화상경마도박장 앞에 세운 천막농성장. (사진=용산화상경마도박장추방대책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