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생각]①신전서 시작된 은행업…‘뱅크’ 어원은 탁자
by김무연 기자
2020.10.19 11:00:00
지상 강의 : ‘인더스토리Ⅱ’ 5강 은행(銀行)
신전에서 농한기에 대출해주고 이자 챙겨
성전 기사단, 세계 최초 ‘글로벌 금융기관’
세계 역사를 바꾼 이탈리아·독일 은행가문
현대 산업사회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들의 과거와 현재를 역사·정치·문화·기술·경제 등 복합적인 시선으로 이해하고 이를 통해 미래를 보는 능력을 기른다. 현대 문명의 기반이 된 ‘철’(鐵)과 ‘사’(沙·모래)부터 코로나19 사태로 주목받고 있는 ‘약’(藥), ‘의’(醫) 등 이 세상 모든 산업의 역사를 다룬다.
미국 조지아공대에서 15년간 교수로 재직. 조지아공대 부설 전자설계연구소 부소장, 조지아공대 기업혁신센터 국제협력 수석고문. 국제 통신표준화 의장. 빅데이터·소프트웨어·게임·블록체인·기후변화 등 다양한 분야의 스타트업에 참여.
[총괄기획=최은영 부장, 연출=권승현 PD, 정리=김무연 기자]현대 자본주의 시대는 금융이 정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 은행업은 첨단 수학과 IT 기술을 집약한 광대한 스펙트럼의 금융 상품들이 유기적으로 엮여있다. 하지만 은행업이 처음부터 이렇게 정교하고 방대한 사업 모델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은행업은 이성(理性)과는 거리가 먼 신(神)과 함께 시작했다.
은행업과 관련한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4000년 전 고대 메소포타미아로 거슬러 올라간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견된 기록에는 농한기 돈을 빌린 농부가 곡식을 수확한 뒤 원금과 이자를 갚아야 한다는 조항이 나와 있다. 농한기 농부에게 곡식을 빌려준 주체는 다름 아닌 신전이었다. 제정일치 사회였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수확한 곡물의 일정량을 성전에 바쳐야 했고 성전은 그 제물을 바탕으로 상당한 잉여 자산을 축적하고 있었다.
임규태 박사는 “신을 모시는 신전이야말로 은행의 시발점이었다”며 “신전을 운영하는 제사장이나 귀족들은 재화를 일반인에게 대출해주면서 짭짤한 수익을 올렸을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로마 삼두정치의 거두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공화정 파에 목숨을 잃었다. 당시 카이사르는 경쟁자 폼페이우스를 제거하고 종신독재관에 오르면서 황제에 오르려고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공화파였던 브루투스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했다.
하지만 임 박사의 해석은 달랐다. 브루투스는 당시 로마 속주에서 고리대금업으로 부를 축적하던 대표적인 금융업자였다. 고리대금업이 횡행하면서 백성의 삶이 피폐해졌고, 이는 로마 지도자들에게 큰 문젯거리였다. 카이사르가 독재관에 집권하자 위기감을 느낀 고리대금업자들이 카이사르와 가까운 브루투스를 사주해 암살을 감행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임 박사는 말했다.
폭군으로 널리 알려진 네로 황제 또한 고리대금업자와의 대결에서 패배한 인물이다. 그는 데나리우스 은화의 은 함유량을 8% 줄이는 일종의 화폐개혁을 진행했다. 화폐개혁은 기존 화폐를 다량으로 보유한 사람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즉, 은화의 형태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던 고리대금업자들은 네로에 반감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고리대금업자들은 네로의 악행을 퍼뜨렸고 그는 황제 자리에서 쫓겨나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에 끝까지 항전했던 마사다 요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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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로 황제 사후 시작된 유대-로마 전쟁 역시 고리대금업자들과의 갈등이 원인이었다. 당시 로마 점령군은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했다. 단순히 성전의 재물을 노린 것이 아니라 성전을 중심으로 고리대금업을 일삼던 유대 사제들을 제압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유대인들은 천혜의 요새 마사다에서 4년을 버티며 항전했지만 결국 모두 스스로 죽음을 택했고, 나머지 유대인들도 고향 땅을 떠나야 했다. 이것이 유대인의 집단 이주, ‘디아스포라’다.
서기 306년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인하는 과정에서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행위를 금지했다. 기독교인의 고리 대금업 금지는 레위기·시편을 근거로 하지만 그 이면에는 고리대금업의 폐해를 우려한 콘스탄틴 대제의 고민이 있었다. 이후 등장한 이슬람교 역시 구약 성서와 꾸란에 따라 금융업을 금기시했다.
반면 유대인들은 신명기의 ‘타국사람에게 이자를 받아도 된다’는 구절을 인용해 비유대인이었던 기독교인, 이슬람인을 대상으로 자유롭게 고리대금업을 할 수 있었다. 결국 유대-로마 전쟁의 패배로 터전을 잃고 유럽 전역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은 유럽과 아시아의 금융업을 장악하기 시작했고 금융업에서 유대인의 영향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사후 1000년이 지나자 기독교 국가들은 고민에 빠졌다. 성경에서 약속한 ‘천년왕국’이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중동의 이슬람 제국이 기독교 성지인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동로마 제국을 위협하고 있었다. 서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은 성지 탈환을 위해 십자군을 조직해 1096년 원정길에 올랐다.
1차 십자군 원정은 성공적이었고 예루살렘 왕국이 세워진다. 하지만 역시 예루살렘을 성지로 삼는 이슬람 제국의 재침공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결국 유럽은 예루살렘 왕국을 수호하기 위해 또다시 십자군을 파견할 수밖에 없었다. 십자군 원정 때마다 많은 기사단이 설립됐는데 그중에서 주목해야 할 기사단이 바로 성전 기사단이다.
1차와 2차 십자군 원정 사이에 만들어진 성전 기사단은 결성 당시만 해도 전투 집단이었지만 갈수록 역할이 변했다. 성전 기사단은 십자군 원정을 떠나 영지를 비워야 했던 영주들의 재산을 관리했다. 또한 서유럽과 예루살렘 곳곳에 지부를 설립해 성지 순례를 떠나는 기독교인들의 환전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순례자가 자국의 자산을 성전 기사단 유럽 지부에 맡기고 자산 증명서를 발급해주면 예루살렘 지부에서 이에 해당하는 현지 화폐로 바꿔주었다. 결국 성전 기사단은 인류 최초의 다국적 은행이었다.
여기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가 성전 기사단에 ‘완벽한 선물’을 제공한다.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성전 기사단에 세속 국가들의 법과 세금 의무를 면제해준 것이다. 교황의 완벽한 선물로 자유를 얻은 성전 기사단은 엄청난 부를 축적했지만 그들에게 빚을 진 영주들은 반발하기 시작한다. 그들 사이에서는 고리대금업을 할 수 없었던 교황이 성전 기사단을 통해 간접적으로 재산을 증식한다는 의심이 퍼져갔다.
결국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1307년 성전 기사단 체포령을 내리고 기사단을 해체했다. 명분은 악마 숭배였지만 그 이면에는 오랜 십자군 원정에서 진 빚을 청산하고 기사단의 재산을 빼앗으려는 봉건 영주들의 의도가 숨어 있었다. 성전 기사단이 체포된 10월 13일의 금요일은 지금도 서양에서 흉일로 인식되고 있다.
성전 기사단을 제거한 필리프 4세는 교황청도 그대로 놔둘 수 없었다. 그는 이탈리아 아나니의 별장에 있던 교황 보나파키우스 8세를 습격한다. 보나파키우스 8세는 분에 못이겨 사건 한 달 만에 죽었고 이어 즉위한 클레멘스 5세를 시작으로 약 70년 동안 교황들은 프랑스 아비뇽에 거주하며 필리프 4세의 눈치를 봐야 했다. ‘아비뇽 유수’라 불리는 이 사건으로 교황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세속 군주의 힘은 세졌다.
임 박사는 “아비뇽 유수와 성전 기사단 해체는 신의 영역이던 금융이 점차 세속으로 넘어오는 계기가 됐다”고 말한다.
글로벌 금융 조직이던 성전 기사단은 영국과 프랑스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지만, 지중해를 통해 동과 서를 잇는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십자군 원정이 한창이던 1157년 이탈리아에선 베니스 은행이 문을 열면서 지중해의 맹주인 이탈리아가 금융업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이탈리아 금융업자들은 항상 탁자에 앉아 손님을 기다렸는데, 이 탁자를 가리키는 이탈리아어 ‘방코’(Banco)가 훗날 은행을 뜻하는 영어 ‘뱅크’(Bank)의 어원이 된다.
이때부터 은행업으로 부를 축적한 귀족 가문이 등장하는데 그 중 가장 유력한 가문이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이다. 메디치 가문은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교황청에 영향을 행사해 3명의 교황을 배출했다. 또 유럽 각국의 왕실과 교류하며 전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를 비롯해 다양한 예술가들을 후원해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것도 메디치 가문의 힘이었다.
교황청이 메디치 가문과 끈끈한 관계를 이어갈 때 세속 군주의 대표인 ‘신성로마제국’은 독일 은행가 야코프 푸거와 손을 잡았다.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푸거는 조상으로부터 받은 재산을 바탕으로 은행·광산 등에 손을 대 크게 성공하면서 유럽 영주들의 물주 노릇을 했다. 특히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막시밀리안 1세와 카를 5세가 황제 자리에 오르는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푸거의 돈을 빌린 사람 가운데 마인츠 대주교 자리를 노리던 알브레히트가 있었다. 푸거의 돈으로 대주교 자리를 차지한 그는 빌린 돈을 갚기 위해 당시 교황 레오 10세에게 ‘면죄부’를 팔 것을 제안한다. 성당 건립 기금이 필요했던 레오 10세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금융가에 휘둘리는 교황청에 반발한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면서 ‘종교개혁’이 시작됐고, 유럽은 신구교간의 종교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결국 은행가의 농간이 인류사를 바꾼 대사건으로 이어진 것이다.
한편 해상 강국이던 스페인은 오히려 금융업이 쇠퇴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당시 스페인은 이베리아 반도를 차지하던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재정복 운동(레콩키스타)이 한창이었다.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여왕이 결혼까지 맺어가며 이슬람 세력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축출하는데 성공한다.
레콩키스타에 성공한 이사벨 여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알람브라 법’을 공표한다. 이슬람 지배의 비호 아래 금융업을 장악한 유대인들은 기독교로 개종을 강요당했고, 개종하지 않은 유대인은 이베리아 반도를 떠나야 했다. 임 박사는 “이사벨 여왕은 정책은 단순히 종교적 이유에서 뿐만이 아니라 지극히 경제적인 관점에서 시행된 것”이라고 평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은 현재 베네룩스 3국이 위치한 프랑스 북부의 플랑드르 지방에 터를 잡게 된다.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은 새로운 금융 허브로 떠올랐고 1609년 암스테르담 은행이 설립된다. 암스테르담 은행은 예금 수취, 결제 서비스, 독자적 화폐 발행 등 현재 중앙은행의 기능을 수행하면서 현대 금융업의 뿌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