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떠날지 모르는 너를 나는 보내고 싶지 않구나
by경향닷컴 기자
2009.10.21 17:44:00
[경향닷컴 제공] 만약 100년 전 사람들에게 ‘서울가는 길’을 물었다고 생각해보자. 도로 대신에 뱃길, 즉 강을 먼저 떠올렸을지 모른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
아니, 구한말과 일제 때 철도를 놓기 전에는 수륙 교통이 육상 교통만큼 활발했다. 당시 뱃길은 고속도로였다. 길 얘기를 꺼낸 것은 여주 여강길 때문이다. 여강길이란 여주를 끼고 흐르는 남한강길을 뜻한다.
뱃길은 아니고 강변길인데 요즘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4대강 사업이 곧 시작된다는 소식에 현장을 보겠다고 찾아온 시민·사회단체 회원들도 있고, 걷기 여행 삼아 찾는 사람도 있다.
여강길은 얼마전 문화체육관광부가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로 선정했다.
| ▲ 남한강을 따라 펼쳐진 여강길은 요즘 걷기 좋다. 강변에는 억새가 한창이고 텃새들도 많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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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는 수륙교통의 요지였다. 남한강 40㎞ 구간에 나루터만 16개가 있었다고 하니, 비유하자면 나룻배터미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로 한강의 4대 나루 하면 서울의 광나루와 마포나루, 여주의 이포와 조포를 꼽는다. 나루터만 북적거리진 않았을 테고 강섶을 따라 주막집도 짚신집도 있었을 것이다. 선비들도 경치 좋은 남한강에서 시화를 그리고, 시를 나눴음직하다.
이 여강길이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04년 남한강 정비사업 때문이었다. 골재채취를 하겠다는 데 대해 발끈한 현지 시민사회·환경단체가 “우리부터 여강을 제대로 알자”며 여강길을 답사했고, 잡초에 묻힌 유적도 찾아냈다. 이후 매년 방학 때마다 여강길 정기답사를 실시해왔고 지난 7월부터는 강길이란 문화단체가 ‘놀토’마다 여강길 답사프로그램을 무료로 운영하고 있다. 여강길 코스는 모두 53㎞. 하루에 다 볼 수는 없다. 현재 운영 중인 코스는 신륵사 강 건너편 강변유원지인 은모래금모래부터 부라우나루터, 우만리나루터, 자연습지를 잇는 14.5㎞로 5~6시간 정도 걸린다.
가을 강변길은 걷기 좋았다. 자동차로 달릴 때는 새 한마리 없던 강변길이었지만 길을 걷다보니 놀란 새들이 여기서 후드득 저기서 후드득거리며 솟아올랐다.
부라우나루터와 우만리나루터 앞에는 수령 300년쯤 되는 느티나무가 굳건하게 뿌리를 박고 있다. 성성한 기둥 못지않게 고루 펴진 가지는 넓은 그늘을 드리웠다. 동행한 박희진 강길사무국장은 “나루터마다 이런 느티나무가 하나씩 있다”고 했다. 이유는?
“일종의 등대였던 셈이죠. 신륵사의 경우는 강 절벽에 서있는 전탑이 이정표 역할을 했지만요. 게다가 사람들이 그늘 밑에서 쉬기도 좋았어요.”
언제부터 나루터가 사라지기 시작했을까. 물론 다리가 생기면서다. 1963년 10월 안양에서 수학여행을 온 흥안초등학교 학생을 태운 배 한 척이 신륵사 조포나루 앞에서 좌초돼 한 반 학생 대부분이 죽자 이듬해 여주대교를 건설했다. (현 여주대교 옆에 있는 이 다리는 지금은 자동차는 못가고 사람들만 다닌다.) 이후 조포나루는 폐쇄됐다. 그럼 마지막 나루는. 이포나루다. 1991년 이포대교가 건설되면서 당시까지도 운행됐던 나룻배도 멈췄다. 다리가 놓인 곳들도 대개 나루터가 있던 자리라고 보면 된다. 큰 길은 나루터로 이어졌고, 길을 따라 다리가 놓였으니 나루터 옆에 다리가 건설된 것은 당연지사다.
옛 영동고속도로인 남한강교를 지나 강변으로 내려서니 자연습지가 나타났다. 습지가 생긴 것은 불과 20년밖에 되지 않는다. 골재 채취를 한 뒤 방치해놓은 웅덩이에 물이 고이고, 풀씨가 날아들면서 자연습지로 변했다. 물 웅덩이에는 수생식물들이 피어있었고, 주변에는 고라니와 개 발자국도 보였다. 물웅덩이에는 달팽이와 고둥이 지나간 흔적도 보였다. 사람들이 파헤쳐 낸 곳이지만 강은 스스로 아물어가며 제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다.
자갈길과 모랫길, 억새·갈대길이 번갈아 나오는 여강길은 아름다웠다. 물억새도 지천으로 피었는데 그늘이 없는 게 단점이지만 단조롭지 않았다. 모랫길에선 신발을 벗고 걸어봤다. 박 사무국장은 여강길이 문화유적코스뿐 아니라 생태탐방코스로도 좋다고 했다. 손톱만한 모래웅덩이를 뒤지더니 명주잠자리 애벌레를 찾아냈다. 이 애벌레는 모래구덩이를 만들어 개미가 빠지면 잡아먹는단다. 해서 손톱만한 모래웅덩이를 개미지옥이라고 부른단다. 강섶에는 호박잎을 닮은 가시박도 많았다. 토종식물을 죽이고 급속하게 번식 중이다. 강섶에는 단양쑥부쟁이도 관찰할 수 있다. 환경부가 정한 멸종위기종으로 충주호 건설로 한동안 자취를 감췄다가 여강에서 다시 발견됐다는 것이다. 바위늪구비의 돌자갈은 검은 빛을 띠었는데 과거 수상식물들이 붙어있었던 증거라고 한다. 수량이 많으면 물길로 변한다. 이 일대부터 충주 목계까지는 제방이 없어 옛 강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해서 시민들의 기증으로 자연유산을 보전하는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지난해 시민공모전에서 바위늪구비 습지에 1등 상을 줬다. 그만큼 보전가치가 높다는 뜻이다.
여강길은 지루하지 않다. 조약돌로 물수제비를 뜰 수 있고 동물발자국도 찾을 수 있으며 강을 울리는 메아리도 들어볼 수 있다. 이야기도, 유적도 많다. 브라우는 붉은 바위를 뜻하는데 우거진 풀숲 옆 암반에는 인현왕후의 오빠 민진원의 정자터가 있었다. 기둥을 세웠음직한 암반에는 또렷하게 기둥자국이 남아있다. 민진원의 호는 붉은 바위를 뜻하는 단암(丹巖)이다. 우만리 나루는 조선시대 우만이라는 이름의 장수가 난 곳이란다. 도리마을과 흔암리 마을을 잇는 아홉살이 산길은 충주사람들이 과거 보러가던 과거길이었는데 9월9일 구절초를 캐내 달여먹으면 모든 병이 낫는다는 전설도 내려온다. 하류의 삼합마을은 남한강과 섬강, 청미천 등 세개 강줄기가 합쳐지는 마을. 원주와 여주, 충주의 경계로 3도사람들이 아직도 체육대회를 한단다. 삼합을 바라보고 있는 흥원창터는 고려 때부터 세곡을 모아둔 조창이다.
이런 여강길이 언제 다시 사라질지 모른다. 4대강 삽질이 시작되면 여주에 강천보, 이포보, 여주보가 생길 예정이다. 이 길이 다시 물에 잠길 수도 있다니…. 아, 답답하다.
*여주 신륵사 강건너편 은모래금모래(강변유원지)에서 한달에 두번 놀토에 무료답사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초등학생도 참여할 수 있다. 은모래금모래 주차비는 무료. 블로그http://blog.daum.net/rivertrail
강길(031-884-9089) 박희진 사무국장(016-744-3930)
*영동고속도로 여주IC에서 빠진다. 37번도로를 타고 여주 버스터미널 방향으로 가다보면 은모래강모래가 나타난다.
*물과 도시락을 싸가지고 가야 한다. 모자와 선크림도 가져가면 좋다. 답사시간은 5~6시간 정도 걸린다.
*단체 탐방객은 놀토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미리 연락을 해서 예약하면 평일에도 답사를 할 수 있다.
*혼자 탐방로를 따라가기는 힘들다. 이정표가 없고 강길이 헷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