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2기 앞두고 리더십 잃은 EU…경제 '소방수'가 없다

by방성훈 기자
2024.12.09 10:51:07

유로존 1·2위 경제대국 佛·獨 정치적 내홍으로 ‘휘청’
EU, 내년 6월까지 리더십 부재…경제위기 심화 우려
中무역분쟁·트럼프 관세·우크라戰·부채위기 등 직면
전기차 수요감소 속 핵심 자동차 산업 보호도 시급

[이데일리 방성훈 기자] 프랑스와 독일이 정치적으로 내홍을 겪으면서 유럽 경제에 암운이 드리우고 있다. 지난달 독일 사회민주당(SPD·사민당)·녹색당·자유민주당(FDP·자민당)의 연립정부가 무너진 데 이어, 이달 4일 프랑스 하원이 미셸 바르니에 정부에 대한 불신임안을 가결하면서 ‘리더십 부재’에 대한 경고 목소리가 잇따르고 있다. 당장 내년 1월부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관세 위협에 대응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더욱 우려를 키우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왼쪽) 프랑스 대통령과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 (사진=AFP)


AP통신은 8일(현지시간) “유럽 경제는 도움이 필요하지만, 프랑스와 독일의 정치적 혼란이 이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보도했다. 프랑스24는 “프랑스와 독일은 더이상 유럽에 필요한 리더십을 제공할 수 없다”며 “유럽연합(EU)은 미지의 영역에 들어서고 있다”고 짚었다.

EU는 현재 중국과의 무역분쟁, 트럼프 당선인의 관세 부과, 부채위기 등에 직면해 있다. 또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한 예산을 마련해야 하며, 전기자동차 수요 감소에 따른 자동차 산업 보호도 시급하다. 하나같이 회원국 간 이견 조율이 필요한 굵직한 사안들이지만, 이를 주도할 지도자가 없다.

그동안 유럽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 사안에 대해선 독일 또는 프랑스가 대응을 이끌었다. 유로존 1·2위 경제대국인 두 국가가 사실상 전체 유럽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만큼,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두 국가 모두 내부 정치적 혼란으로 대외 문제엔 신경을 쓸 수 없는 상황이다.

62년 만에 내각이 붕괴한 프랑스는 지난 6월 조기총선을 치른 탓에 헌법상 내년 6월까지는 선거가 불가능하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새 총리를 임명할 예정이지만, 야당의 반대를 뚫고 과반 지지를 확보하긴 어렵다. 새 총리 임명을 놓고 여야 간 힘겨루기가 예상돼 정치 공백이 불가피하다. 심지어 마크롱 대통령을 향한 사퇴 압박도 거세지고 있다.

독일에선 이달 올라프 숄츠 총리에 대한 신임 투표가 치러진다. 연정 붕괴로 과반을 득표할 수 없기 때문에 불신임을 피할 수 없다. 결국 집권 여당인 사민당과 제1야당인 기독민주당(CDU·기민당)은 내년 2월 23일 총선을 치르기로 합의했다. 4월까지는 새 정부 구성을 위한 협상이 지속될 전망이다.

유라시아그룹의 유럽 담당 이사인 무즈타바 라흐만은 AP에 “유럽에선 프랑스와 독일의 협력 없이 아무것도 움직일 수 없다”며 “특히 프랑스의 경우 경제 문제 대응에 있어선 완전한 마비 상태에 직면할 수 있는데, 이는 명백히 유럽 전체 경제에 문제가 된다”고 지적했다.



미국 퀸시연구소의 외교정책 분석 전문 매체인 ‘책임 있는 국가정책’(responsible statecraft)은 “프랑스 정부와 독일 집권 여당의 붕괴는 EU의 지속적인 위기를 뜻한다”며 “유럽의 중심이 흔들리고 있다”고 우려했다.

가장 시급한 현안은 트럼프 당선인이 예고한 10% 관세 부과다. 이미 미 달러화 대비 유로화 가치는 트럼프 당선인의 승리가 가시화한 지난 9월 말 이후 5% 이상 하락했다. 도이체벨레는 “트럼프 당선인이 내년 1월 취임 준비를 하는 동안 EU의 두 강대국은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위축에 직면했다”고 꼬집었다.

자동차 산업 보호도 시급하다. 자동차 산업은 EU GDP의 7% 이상을 차지하며, EU 역내 제조업 고용의 8.1%인 약 240만명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다. 하지만 전기차 수요 감소, 중국산 저가 전기차 공세, 폭스바겐의 독일 공장 폐쇄 결정으로 위기의식이 극대화했다.

이에 EU는 중국산 전기차에 기존 일반관세 10%에 더해 최대 35.3% 추가 관세를 부과했다. 이후 양측의 관계는 급속 냉각하고 있다. 문제는 EU가 경제적으로 중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은 지난해 EU의 역외 수입에서 20.6%, 역외 수출에서 8.8%를 각각 차지했다. 최대 수입대상국이자 세 번째로 큰 수출대상국이다. 중국의 대(對)EU 외국인직접투자는 68억유로에 달한다.

수출 중심 경제 체제인 EU에 심각한 피해가 예상되는 대목이다. EU집행위원회는 유로존(유로화 사용 20개 EU 회원국) 경제가 올해 0.8%, 내년 1.3% 성장할 것으로 추산했다. 프랑스는 올해 1.1%, 내년 0.8% 성장률이 예상된다. 독일 경제는 올해 0.1% 마이너스(-) 성장해 2년 연속 위축되고, 내년엔 0.7%로 완만하게 회복될 것으로 예측됐다. 그러나 독일경제연구소(IW)는 올해 0.2% 역성장한 뒤 내년에도 0.1% 성장에 그칠 것이라며 더욱 보수적인 전망을 내놨다.

이외에도 EU는 러시아의 침략 위협과 미국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탈퇴 가능성에 직면해 있다. 이는 EU가 군사지출을 위해 주머니를 더 열어야 한다는 의미다.

프랑스 경제학자이자 국립과학연구센터의 연구 책임자인 앤-로르 델라트는 “프랑스와 독일의 경제적 약세는 EU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며 “유럽의 전 세계적 입지를 약화시키거나 현재 좋은 성과를 보이고 있는 네덜란드나 스페인과 같은 다른 유럽 국가로 권력과 영향력을 넘길 수 있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