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美경제)③`팍스 달러리움` 일몰하나
by전설리 기자
2008.03.20 14:49:30
연준 `달러 퍼붓기`..공격적 금리인하-유동성 공급
인플레 가중의 `악순환`→버냉키의 수수께끼
도전받는 달러..기축통화 위상 `흔들`
[뉴욕=이데일리 전설리특파원]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헬리콥터`를 동원해 달러를 퍼붓고 있다. `달러 퍼붓기`가 위기의 미국 경제를 구조해 낼 것인가.
달러가 날개없는 추락을 거듭하는데도 미국의 금융위기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음에 따라 `달러 퍼붓기`의 효과마저 의심받고 있다.
유로/달러는 1.5달러를 돌파하며 연일 사상최저 행진이다. 엔화 대비 추락 속도는 더욱 가파르다. 달러/엔은 12년만에 100엔선을 뚫고 내려섰다.
이로 인해 일부 국가에서는 자국 통화 가치를 달러에 고정시키는 제도인 달러 페그제를 포기하려는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다. 산유국들도 석유를 팔아 달러로 받기를 꺼리고 있다. `세계의 기축통화`라는 달러화의 위신이 말이 아니다.
`팍스 달러리움`의 종료를 예언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상품 투자의 귀재 짐 로저스는 "미국 달러에는 심각한 흠집이 났다. 달러 시대의 종료가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고 진단했다.
과연 반세기 동안 전세계의 기축통화로 군림해온 `팍스 달러리움`은 이대로 몰락할 것인가.
최근 달러화 급락의 배경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공격적인 금리인하다.
벤 버냉키 연준 의장은 확실한 공격수로 변신했다. 그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에서 촉발된 신용위기의 확산을 방지하고, 당면한 경기후퇴(recession)를 방어하기 위해 지난해 9월부터 6개월간 총 여섯 차례에 걸쳐 300bp의 공격적인 금리인하를 단행했다. 추가 금리인하 가능성마저 열어뒀다.
기준금리는 돈의 이자, 곧 돈값이다. 금리를 낮춘다는 것은 은행들이 중앙은행에서 빌려쓸 수 있는 달러값을 낮춘다는 의미다.
뿐만 아니다. 연준은 자금시장의 경색을 막기 위해 `TAF(term-auction facility)` `PDCF(Primary Dealer Credit Facility)` 등 새로운 유동성 공급방안을 고안, 그야말로 시중에 달러를 쏟아내고 있다.
300bp의 금리인하로 미국의 현행금리는 2.25%로 낮아졌다. 최근 인플레이션 지표인 근원 개인소비지출(PCE) 물가지수 상승률이 연율 2.2%를 기록했음을 감안할 때 추가 금리인하는 `실질금리 마이너스` 시대의 도래를 예고하고 있다.
연준의 공격적인 금리인하가 위태로워 보이는 것은 이미 미국의 경제가 악화될대로 악화된 상황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쌍둥이 적자`(경상적자와 재정적자)는 서서히 미국 경제를 좀먹어왔다. 지난해 9월말 현재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5.5%에 이른다.
일찌기 워렌 버핏은 미국을 가리켜 `낭비마을(Squanderville)`이라 불렀다. 낭비마을은 오랫동안 절약마을(Thriftville, 중국 등 아시아 국가를 일컬음)의 물건을 가져다가 썼다. 매년 미국인들은 해외에 파는 물건보다 약 7000억달러어치 더 많은 물건을 해외에서 들여온다.
이에 따라 미국의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와 중국 등 신흥국가와 중동국가들의 경상수지 흑자는 오랫동안 불균형 상태를 유지해왔다. 미국이라는 국가를 하나의 가계나 기업으로 축소시켜 봤을 때 그토록 오랫동안 적자를 유지한 가계나 기업은 이미 파산을 선언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가 성장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각국 중앙은행들이 미국 국채를 사줬기 때문이다. 중앙은행들이 미국 국채를 사들이면 미국 정부는 이 돈으로 무역적자를 메웠다.
이것은 달러가 강할 때 이야기다. 각국 중앙은행들이 미국 국채를 사들였던 것은 미국 경제와 강한 달러에 대한 믿음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로 촉발돼 월가의 거인 베어스턴스까지 쓰러뜨린 신용위기 사태로 미국 경제에 대한 신뢰는 흔들리고 있다. 중앙은행들은 이미 달러 자산 청산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버냉키 의장은 공격적인 금리인하를 통해 달러를 풀어 미국 경제의 70%를 떠받치고 있는 소비를 진작시키고, 실물경제를 살리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나 소비 진작이 미국이라는 제국의 부채를 더욱 확대시킬 것이라는 점은 아이러니다. 이것이 바로 미국 경제와 달러화가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점이다.
어쨌든 버냉키 의장은 달러화 가치를 낮춰(금리 인하) 실물 경제를 살리고자 팔을 걷어부쳤다.
그러나 여기서 또 다른 수수께끼에 봉착한다. 단기 금리를 낮추면 모기지 금리 등 장기 금리가 함께 낮아져야 하는데 거꾸로 장기 금리(장기 국채가격 하락)가 상승하고 있다. 금리인하가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인플레이션 기대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연준은 "인플레이션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시인했다. 페드 와처들은 연준이 경기가 반등세를 타자마자 바로 `인플레이션 파이터` 본연의 자세로 돌아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제 연준이 얼만큼의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인플레이션이 걷잡을 수 없는 수준까지 치솟기 전에 경기가 안정적인 반등을 이뤄내야 연준이 계산된 시나리오대로 포지션을 변경할 수 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미국 경제는 고물가와 경기침체를 동반하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에 들어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과 달러의 추락 속에 상품시장은 이미 인플레이션 망령에 사로잡혔다.
달러 가치가 추락하자 투자자들은 인플레이션 헤지를 위해 달러표시 자산(주식 및 채권)을 내다팔고 상품시장으로 몰려들었다. 헤지펀드는 물론이고 국부펀드까지 상품시장으로 뛰어들었다. 덕분에 `유가 100달러-금값 1000달러` 시대가 도래했다.
스코크 리포트의 스티븐 스코크 사장은 "원유 선물시장은 위험을 대비해 보험을 들어두는 시장이 아니라 인플레이션을 헤지하기 위한 시장으로 변모했다"고 분석했다.
문제는 인플레이션 헤지가 상품 투자를 부추기고, 급등한 상품 가격이 다시 인플레이션 압력을 가중시키는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됐다는 점이다.
옵션익스프레스의 롭 쿠르자트코우스키 선물 애널리스트는 "(인플레 기대심리로 상품에 투자금이 몰려) 인플레이션을 키우고 있다"며 "예언이 스스로 실현되는 것(self-fulfilling prophecy)과 같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쯤되자 기축통화로서의 달러의 위상은 크게 흔들리고 있다.
사실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위기가 처음은 아니다. 지난 1971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베트남전 패배에 따른 막대한 전쟁비용 후유증으로 미국 금 보유액이 바닥나자 금본위제(달러를 항상 금과 바꿀 수 있도록 한 제도)를 폐지하면서 달러의 지위는 통째로 흔들렸다.
당시 존 코놀리 재무장관이 "달러는 미국의 통화이지만 여러분의 문제이기도 하다"며 달러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중국과 인도 경제 부상, 러시아 패권 강화, 유로화 출범, 국부펀드 영향력 강화 등 달러에 대한 환경이 녹록치 않은 상황에서 서브프라임 부실 문제가 터졌고, 금융의 최첨단을 자랑하는 월가를 통해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졌다.
달러가 당장 몰락하지는 않더라도 서서히 패권을 잃어갈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셉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는 "전세계 외환 보유 시스템이 혼란스러워졌다"며 "외환 보유고에서 달러를 제외시키려는 움직임이 지속되면서 달러 가치의 하락을 더욱 부축길 것"이라고 전망했다.
제프리 가텐 예일대 경영학 교수는 "외환시장에서 전세계 정치·경제 파워의 재편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있다"며 "저울추가 꽤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