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정원석 기자
2009.10.12 15:30:59
[이데일리 정원석기자] “그래도 귀족들이 곡물을 내다팔지 않으면 어쩌시겠습니까”(미실)
“그러면 군량미를 시장에 내다팔겠습니다”(덕만공주)
“군량미를 내다 팔다니요. 만약 백제가 전쟁이라도 걸어오면 어떻게 하시려고 합니까”(설원)
“팔 수도 있고 안 팔 수도 있습니다. 군량미를 내다판다고 이야기만 할 겁니다. 그러면 겁에 질린 귀족들은 곡물가격이 더 떨어지기 전에 내다팔려고 할 겁니다”(덕만공주)
귀족들의 곡물 사재기에 대응하기 위해 덕만공주는 황실의 곳간을 열었다. 시장에 곡물 공급량을 늘려 가격을 낮추기 위해서였다.
그럴수록 귀족들은 더욱 사재기를 하며 가격을 띄웠지만, 공급량이 늘어나는 `펀더멘탈`상 변화를 막지는 못했다. “황실 재산 가지고 장사하냐”고 덕만 공주를 몰아붙였지만, 돌아온 것은 “곡물 값을 잡기 위해서는 군량미도 풀 수 있다”는 싸늘한 구두개입(?)성 발언이었다.
드라마 <선덕여왕>속 장면이다. 흉년기에 곡물을 사재기해 비싼 이자를 받고 영지 안의 자영농들에게 빌려준 뒤 이를 못 갚았다는 이유로 땅을 뺐는 귀족들의 전횡을 막기 위해 덕만 공주는 `기대심리`를 이용했다.
그런데 이 장면은 최근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의 언행과 빼닮았다. 상황도 비슷하다. 신라시대 귀족들은 흉년기를 이용해 땅을 넓혔다. 대공황 이후 최대 위기라는 상황에서 빚어진 사상 최저수준의 금리가 주택담보대출 급증과 부동산 가격 상승 요인이 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덕만 공주가 황실 곳간을 연 것처럼 이성태 총재는 지난 8월 금융통화위원회 이후 시시때때로 부동산 가격 상승에 대한 우려를 제기하며 기준금리 인상 필요성을 강조했다.
지난 9월 금통위 때에는 “상당히 낮은 정책금리를 가져갈 때 그것이 너무 많은 빚을 지도록 작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부동산 등에 거품이 발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고 경고했다. 또 “2.0%인 기준금리를 일부 올리더라도 금융완화 상태”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당연히 부동산 값 불안을 이유로 기준금리를 올릴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한은이 사상 최저인 2.0%의 기준금리에 불편함을 느낀다는 인식도 이런 해석을 정당화시켰다.
이와 좀 다른 해석도 있었다. 이 총재의 시선 다른 한 쪽은 정부를 향해 있었다는 것. 부동산 가격 상승에 대한 경각심을 촉구했다는 해석이다. “(부동산이) 좀 안정되면 현재 경기라든가 고용이라든가 이런 것을 위해서 쓰고 있는 통화정책의 기조는 당분간 끌고 가도 큰 문제가 없다”고 한 대목에서 유추됐다.
한은은 일련의 규제 완화가 집값 상승의 주된 원인 중 하나라고 보고 있다. 경기 부양을 위해 부동산 규제를 푼 정부에 사태의 심각성을 경고했다고 보는 이유다. 이런 경고는 자산가격 상승에 대한 대처 방안이 나오지 않으면 기준금리를 올릴 수 밖에 없다는 메시지로 이어진다. 곡물 사재기를 계속하면 군량미를 풀겠다고 한 덕만 공주와 비슷한 대응이다.
이 총재는 더 완강했다. 기획재정부와 청와대가 "출구전략 논의는 시기상조"라며 압박을 가했지만, 금통위를 이틀 앞둔 7일에도 "우리나라 부동산은 별로 안 떨어졌다가 올라가는 것으로 조짐이 좋지 않다”며 금리인상 필요성을 역설했다.
드라마에서 덕만 공주는 이겼다. 귀족들은 손해를 보면서도 곡물을 투매했고, 가격은 급락했다. 반면 덕만 공주는 팔았던 가격보다도 낮은 가격으로 곡물을 사서 곶간을 채웠다. 팔았을 때와 샀을 때의 가격차이로 발생한 이익을 가지고는 농기구를 제작했다. 귀족이 아닌 황실에 세금을 내는 자영농을 키우기 위해서다. 왕권 강화를 위한 경제적 기반을 만든 셈이다.
이성태 총재의 발언 효과도 비슷하다. 일단 정부의 부동산 규제 수위가 높아졌다. 은행들의 총부채상환비율(DTI) 확대 적용대상을 수도권 전역으로 넓힌데 이어, 10월 금통위 전날인 8일에는 제2금융권으로 까지 규제 범위를 확대했다.
이 총재 발언을 기준금리 인상 신호로 받아들인 시장 역시 빠르게 반응했다. 지난 4월 이후 정체상태였던 양도성예금증서 금리는 2.9%대로 올라서며 9월 금통위 이후 0.3%포인트 이상 올랐고, 대출 금리 역시 비슷한 폭으로 올랐다.
정부의 규제 강화와 대출금리 상승은 주택담보대출 증가세를 주춤하게 했다. 지난 8월까지 월 평균 3조원 이상 늘어났던 주택담보대출 증가액은 9월들어 2조4000억원대로 줄었다. 빚을 내서 집을 사야겠다는 정서에 어느 정도 제동이 걸렸다고 볼 수 있다.
어찌 보면 이성태 총재의 `금리인상 시사` 발언은 기준금리를 올리지 않고도 `인상 효과`를 나타냈다. `군량미를 팔 수도 있다`는 말로 곡물 값을 잡은 덕만 공주처럼.
이 총재가 10월 금통위에서 “앞으로 부동산쪽의 가격 움직임이 더 안정되는지, 아니면 잠깐 쉬고 도로 그런 심리가 되살아날지 지켜봐야 될 것 같다”며 한 발 물러선 것도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충분히 효과가 나오고 있는데 더 강경한 발언을 해서 역풍을 불러일으킬 이유가 없다는 현실적 판단도 작용했다는 평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는 10월 금통위 내용에 대한 우려가 크다. 중앙은행의 신뢰를 가지고 한 `위험한 게임`이라는 지적이다. 금리인상 필요성을 강조했던 한은 총재가 한 달 만에 입장을 바꾸면서 한은 정책 기조에 대한 의구심이 증폭됐다는 것이다. 그만큼 한은이 확보하고 있는 시장의 신뢰는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정작 금리인상이 임박하고, 이를 시사했을 때 아무런 시그널을 주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늑대가 나타났다"는 양치기 소년의 외침이 처음 몇 번에는 먹혔지만, 정작 늑대가 왔을 때는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 것 처럼. 구두 경고가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한은의 `패`를 하나 줄이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한 통화정책 전문가는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서 중앙은행이 독립적이라고 하더라도 대통령의 국정 운영방침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면서 “중앙은행에 대한 믿음이 떨어진 만큼 시장은 정책 리스크에 대한 프리미엄을 짊어질 수 밖에 없게 됐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