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오펜하이머 속 핵분열, 상업원전 기틀
by강민구 기자
2023.08.23 11:08:04
중성자가 원자핵과 충돌···핵분열 연쇄반응
'천재물리학자' 아인슈타인 이론 활용
희생 컸지만 '과학계 어벤저스' 이끌며 연쇄반응 입증
페르미 통해 상업 원전 연구로도 이어지는 계기 마련
[이데일리 강민구 기자]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개봉 후 일주일 연속 국내 흥행수익 1위를 차지하며 흥행하는 영화 ‘오펜하이머’에 나오는 명대사다. 자신이 만든 핵폭탄이 일본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떨어져 위력을 확인함과 동시에 수십 만 명의 사상자를 내자 이론인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느낀 도덕적인 고뇌를 풀어낸 부분으로 보인다.
오펜하이머는 과학자이면서도 군사용에 필요한 기술을 개발해 희생자가 나오는 것을 묵인했다는 점에서 부정적 평가를 받는다. 반면 미국의 핵무기 개발계획인 맨해튼 계획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전쟁을 끝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
과학적으로 그는 이론에만 머물렀던 핵분열 연쇄반응을 대형 실험으로 증명했다. 맨해튼 계획에도 함께 참여한 이탈리아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가 훗날 연쇄반응 제어 연구를 했고, 상업용 원전의 기틀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그의 역할이 컸다. 핵폭탄과 같은 치명적인 무기에 쓰이기도 하고, 우리 생활에 필요한 전기를 생산하는 원전에도 활용되는 핵분열은 뭘까.
| 과학자 오펜하이머의 내적갈등을 다룬 영화 ‘오펜하이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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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분열은 우리 눈이나 현미경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작은 입자인 원자로부터 시작된다.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구성되며, 원자핵에는 여러 개의 양성자와 중성자가 서로 단단하게 뭉쳐 있다. 이러한 결합에 변화가 생기면 원자핵을 서로 결합했던 에너지를 방출한다. 예를 들어 우라늄이나 플루토늄처럼 무거운 원자핵이 중성자와 충돌해 쪼개지면서 강한 에너지를 발생시킨다.
이러한 현상은 2차 세계대전 직전인 1938년에 독일의 과학자 프리츠 슈트라스만과 오토한이 실험하던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중성자를 우라늄235 원자핵과 충돌시키는 과정에서 막대한 양의 에너지가 방출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것으로 풀이된다.
핵분열 이론을 구체화한 것은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이다.
특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핵분열로 발생하는 에너지와 질량은 핵분열 반응 전후 서로 등가(같은수준)으로 바뀔 수 있다. 질량과 에너지가 동등하면서 서로 교환될 수 있기 때문에 정지한 물체도 질량을 가졌다면 에너지로 변환할 수 있게 되는 등 물리학의 진전이 일어났고, 핵폭탄 제조 원리에도 쓰이게 됐다.
영화속에 아인슈타인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하버드대 화학과를 졸업한 오펜하이머는 영국 케임브리지대와 독일 괴팅겐대로 유학을 떠나 ‘양자역학의 아버지’ 닐스보어, 아인슈타인 등 당대 최고의 과학자들과 교류했다. 한상욱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양자정보연구단장은 “원자폭탄 개발도 결국 원자 단위의 미세한 구조를 파악하고 원리들을 헤쳐나가는 점에서 양자역학과도 밀접하다”고 설명했다.
미국 대학에서 교수로 지내던 오펜하이머는 수학자, 물리학자 등 미국 주도의 ‘어벤저스’ 연구팀을 이끌며 이론을 실증(일본에 폭탄 투하)했다. 원자력 전문가에 따르면 연구 과정은 험난했을 것으로 보인다. 가령 고농축 우라늄 제조부터 핵분열 연쇄반응이 제대로 일어났는 지 여부도 새로 확인하는 등 정밀한 계산과 측정, 연구가 뒷받침돼야 했다.
정동욱 중앙대 에너지시스템공학부 교수는 “폭탄에 쓰인 우라늄235는 전 세계에 0.7% 밖에 존재하지 않는데다 이를 채굴해서 고농축을 하는 기술도 당시에 없어 개발을 새로 해야 했다”며 “핵분열이 팽창하면서 흩어지지 않고 연쇄적으로 모여 일어나는데 필요한 임계치(일반적으로 95% 순도, 무게 20kg)를 확인하는 등 어려움이 있었지만, 전쟁 속 미국 정부의 과감한 지원에 수학자, 물리학자 등 과학자들이 총동원돼 폭탄개발까지 해냈다”고 했다.
흥미로운 부분은 핵분열 반응이 최근에는 평화적으로 이용되면서 인류 에너지문제 해결을 위한 기술로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엔리코 페르미는 연쇄 반응을 제어해 에너지를 활용하는 데 관심을 뒀다. 시카고대에서 세계 최초 원자로 ‘시카고 파일’을 구현했고, 후속 연구들이 이뤄지면서 원자력 발전소 건설까지 이어졌다.
원자력 발전의 원리는 핵분열 반응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원자폭탄과 같다. 다만, 연쇄 반응이 아니라 제어봉을 통해 제어해 추가 반응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원자폭탄에 필요한 고농축 우라늄도 아닌 저농축 우라늄을 이용해 안정적으로 핵분열이 일어나게 하는 등 안전성이 더 강화됐다는 부분도 다르다.
정 교수는 “당시 시대상 군사용으로 원자폭탄을 개발할 수밖에 없었지만, 후속 연구가 이어지며 원전 상용화, 잠수함 등으로 원자력 기술이 각광을 받으며 발전할 수 있었다”며 “오펜하이머를 ‘원자력계 아버지’라고 부르지는 않지만, 과학자들을 모아 핵분열반응을 주도한 원자폭탄 개발로 훗날 페르미를 통한 상용화 초석을 마련한 부분은 높이 평가할만 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