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리라화 폭락에도 대통령은 '마이웨이'

by방성훈 기자
2021.11.24 11:22:23

에르도안 “금리인하로 경제 독립전쟁 승리할 것” 연설
리라화, 달러 대비 15%↓…올 들어서만 40% 이상 폭락
추가 금리인하 가능성에 금융시장 우려·경고 확산
"얼마나 더 떨어질지 몰라…하이퍼 인플레 초래할 것"

(사진=AFP)
[이데일리 방성훈 기자] 터키 리라화 가치가 폭락하고 인플레이션 우려가 극대화하고 있는데도,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기준금리 인하를 추켜세우면서 “경제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는 리라화 가치 하락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으며, 터키 내부는 물론 국제 금융시장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3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 CNBC 등에 따르면 에르도안 대통령은 전날 내각회의 직후 진행한 연설에서 “금리(인하) 정책이 물가상승을 억제하지 않을 것”이라며 터키 중앙은행의 기준금리 인하를 강하게 옹호했다.

터키 중앙은행은 지난 18일 기준금리인 1주일 레포금리를 16%에서 15%로 1%포인트 내리며 세 달 연속 기준금리 인하를 단행했다. 앞서 터키 중앙은행은 지난 9월 기준금리를 19%에서 18%로, 10월에는 18%에서 16%로 각각 인하했다.

이는 터키 중앙은행이 에르도안 대통령의 금리 인하 압박에 굴복한 영향이다. 오랜 기간 높은 금리를 인플레이션을 악화시키는 ‘적(敵)’으로 규정해 온 그는 터키 중앙은행 총재는 물론 부총재와 통화정책 위원 등까지 자신의 요구를 듣지 않은 인사들을 즉각 해임·교체하며 금리 인하를 압박해 왔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리라화 가치가 하락하면 수입물가가 올라 수입이 줄고, 수출 제품들이 해외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을 갖춰 적자가 줄어들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상황이 선순환으로 이어져 리라화 가치를 다시 끌어올리고, 수입물가도 안정될 것이라는 논리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전날 연설에서도 “터키 정부의 정책 우선 순위는 성장에 있다. 고금리와 저환율의 악순환 대신 투자와 생산, 고용, 수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금리인하는) 터키를 위한 올바른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터키 경제의) 종말을 말하는 이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특히 터키의 나홀로 금리인하 행보를 1923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터키 공화국 기반을 다질 때 외세에 맞섰던 투쟁에 비유하며 “신의 도움과 우리 국민들의 지지를 토대로 우리는 이번 경제 독립전쟁에서 승리하게 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또 인플레이션을 우려하며 금리인상을 요구하는 터키 경제학자들을 “기회주의자”로 묘사하며 맹비난했다. “글로벌 금융 곡예사들(acrobats)에게 굴복하지 않겠다”고도 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연설 이후 리라화 가치는 폭락했다. 장중 달러화 대비 15% 가량 하락해 1달러에 13.44리라까지 치솟았다. 이후 낙폭을 11%까지 줄이긴 했지만, 심리적 저항선인 11리라를 돌파하며 역대 최저 수준을 지속하고 있다. FT는 “리라화는 올해 달러화 대비 40% 이상 하락했다”면서 “지난 2018년 터키의 외환위기를 넘어선 하락세”라고 설명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사진=AFP)
금융시장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이스탄불에 본사를 둔 테라 인베스트먼트의 엔베르 에르칸 애널리스트는 “공포 영화와 같다”며 “터키 중앙은행이 금리를 더 내릴 의향이 있는 만큼 리라화 가치가 얼마나 더 폭락하게 될 지 말하기 어렵다”고 내다봤다.

리걸 앤드 제너럴 인베스트 매니지먼트의 이머징 마켓 부채 책임자인 우데이 팟나이크는 “리라화 폭락을 막을 수 있는 건 터키 중앙은행의 신호 뿐이지만,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며 “에르도안 대통령은 금리를 연속적으로 내리는 것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실제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난 18일 3개월 연속 금리인하 이후 “기뻤다”고 표했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은 에르도안 대통령의 주장에 논리적 결함이 있다고 경고한다. 에너지와 원자재 수입에 크게 의존하는 국가의 통화가치 하락은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초래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하이퍼 인플레이션은 물가 상승이 정부 통제를 벗어나 수십·수백 퍼센트의 인플레이션율을 기록하는 상황을 뜻한다. 터키 물가는 이미 1년 전보다 20% 폭등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금리인하 압박에 맞섰다가 지난 달 해임된 세미 투멘 전 터키 중앙은행 부총재는 트위터를 통해 “터키 정부는 성공 가능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이 말도 안 되는 실험을 포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면서 “리라화 가치와 터키 국민들의 복지를 보호하는 고품질 정책으로 즉각 돌아가야 한다”고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