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인 장관선임 막는 '주식 백지신탁' 개정해야"
by정태선 기자
2017.10.15 15:30:00
업계·관계 한목소리 주장
'공직 진출 땐 주식 처분 의무' 탓에
'장관 후보' 장병규 의장 등 발목
"유능한 기업인 공직 진출 위해
무조건 매각 대신 대안 찾아야"
[이데일리 정태선 기자] 문재인 정부 출범 5개월이 지났지만 유일하게 장관자리가 공석인 중소벤처기업부 인사난맥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는 ‘백지신탁’제도에 대한 전면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15일 업계 및 관계에 따르면 ‘백지신탁’ 제도에 발목이 잡혀 애초 계획했던 실무형 중소기업인보다는 정치인쪽으로 중기부장관 후보군이 좁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는 그간 주로 기업인을 대상으로 27명 넘게 러브콜을 보냈지만 기업인은 장관직을 맡으면 자신의 주식을 모두 팔아야 하는 ‘백지신탁 제도’ 때문에 일할 엄두를 못내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4차산업혁명위원장으로 임명된 장병규 블루홀 이사회 의장도 애초 청와대가 고민한 1순위 중기부 장관 후보자로 알려졌다. 벤처업계에서 신화적 존재로 꼽히는 장 위원장은 게임업체 네오위즈 공동창업, 검색기술 전문 스타트업 ‘첫눈’ 매각, 게임업체 블루홀 설립, 스타트업 지원 전문 벤처캐피털(VC)기업 ‘본엔젤스’ 창업 등 손대는 사업마다 성공 신화를 일궜다. 하지만 그 역시 ‘주식 백지신탁’이 발목을 잡았다. 블루홀 이사회 의장인 그는 이 회사 지분 20.4%를 보유한 최대 주주다. 비상장 회사이지만 장외주가를 토대로 계산하면 장 의장의 지분 가치가 9000억원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청와대 관계자도 “기업의 경영권 확보 문제도 걸려 있어 결국 백지신탁에서 자유로운 위촉직으로 활동하게 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2005년 11월 도입된 백지신탁제도는 공직자윤리법에 따라 고위 공직에 임명된 사람과 배우자 등이 3000만원 이상 직무관련 주식을 갖고 있으면 임명 한달 안에 팔거나 금융회사에 맡겨 처분해야 한다. 공직자가 직위를 이용해 자신이 가진 주식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정책을 입안하지 못하도록 한 제도다.
| [이데일리 신태현 기자]장병규 블루홀 의장이 경기 성남시 분당구 블루홀 본사에서 이데일리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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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제도는 도입 전부터 기업인 출신 공직자의 경영권 방어문제로 논란이 거셌다. 시행 후에도 서울 고등법원의 위헌 제청으로 헌법재판소에서 시시비비가 가려지는 등 잡음이 적잖았다. 헌재는 2012년 8월 합헌 결정을 내렸지만 위헌과 합헌의 의견을 낸 재판관이 4대 4로 동수를 이룰 만큼 논란이 큰 사안이었다.
반면 앞서 백지신탁을 도입한 선진국은 우리나라와 다르게 운영하고 있다. 미국은 백지신탁에 대한 의무조항이 없다. 다만 고위 공직자인 대통령, 부통령, 연방의원 등이 주로 백지신탁 대상인데 정부윤리법에 따라 윤리계약에 서명하고, 충돌 우려가 있을 시 3개월 이내에 재산을 처분하거나 신탁, 사임, 전보 등의 절차를 거치면된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같은 주식 백지신탁제도가 없다. 취임시 보유하는 주식, 전환사채 등 유가증권에 대해 신탁은행 등에 신탁하면 된다. 재임기간 중 계약 해약 및 변경이 불가하다는 규정도 포함됐다. 다만 특정 계좌에서 운영하는 것은 제외된다. 이런 경우 장관 등을 퇴임할 때 해당 계좌에 대해 재임기간 중 거래잔액보고서를 내각관방장관에 제출해 재임기간 중 거래가 없는 사실을 고지할 의무가 있다.
영국에서는 고위공직자를 대상으로 한 백지신탁제도가 재정적인 이해관계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대체 조치 중의 하나로 활용된다. 백지신탁제도에 관한 명시적인 규정은 없다. 그 판단은 전적으로 장관의 개인적인 책임으로 규정한다. 오랜 관행과 합리적인 판단을 존중하는 영국 사회의 시스템과 같이 주식 백지신탁제도도 기본적인 절차 규정만으로 운영한다.
중기·벤처업계에서는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논란이 되고 있는 백지신탁제도에 대한 법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안건준 벤처기업협회 회장은 “주식 백지신탁제도로 인해 능력 있는 기업인들의 공직 진출이 제한되고 있다”며 “이번 기회에 제도 개선 논의가 시작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3년 박근혜 정부 시절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회장은 기업인 출신으로 처음 중소기업청장에 내정됐지만, 주식을 처분해야 한다는 백지신탁 제도 때문에 고민 끝에 사의를 표명했다. 권동일 한국표준과학연구원장 역시 지난해 10월 서울대 교수 시절 자신이 설립한 벤처기업의 주식을 처분해야 한다는 백지신탁 제도를 뒤늦게 알고 취임 4개월 만에 중도 사퇴했다. 황 회장은 “공직자가 공정하게 업무를 수행하도록 하는 제도의 취지는 십분이해하고 존중하지만 우리나라가 기업인의 현장 경험과 전문성을 행정에 융합하고 창조경제의 미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취지를 살리면서도 합리적으로 법과 제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업계 관계자는 “무조건 매각하는 게 아닌 해당 임기와 일정 기간 신탁을 해뒀다 돌려받는 대신 늘어난 이득에 대해서는 국고로 환수하는 방안 등을 대안으로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라며 “현업현장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능력 있는 기업인들이 공직에 참여해 국가경제에 기여할 수 있도록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