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쯔다 브랜드 히스토리 - 로터리에 담긴 ‘결코 포기하지 않는 기술자의 혼’

by김학수 기자
2016.06.03 13:26:24



[이데일리 오토in 김학수 기자] 독창적인 디자인, 과감한 기술의 도입으로 세계 시장에서의 입지를 다져가는 마쯔다의 시작은 지금과 다른 다른 모습이었다. 마쯔다의 시작은 한 세기 전 히로시마의 한 어부의 가정에 태어난 마쯔다 유지로(Matsuda Jujiro)부터 그 역사가 시작된다. 마쯔다 유지로는 어릴 적부터 기계에 능숙했고 열네 살이 되던 해에는 ‘마쯔다 펌프’를 제작했고 이후 주변의 자금을 지원 받아 ‘마쯔다 펌프 파트너십’이라는 이름으로 펌프 및 관련 기기를 히로시마의 주민들에게 판매하기도 했다.



신생 업체지만 기계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가지고 있던 마쯔다 펌프 파트너 십은 1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군수 물자를 생산하는 군수공장으로도 활용됐지만 1차 세계대전 종료와 수익성 등의 문제로 인해 유지로 마쯔다는 ‘마쯔다 펌프 파트너십’ 사업을 모두 철수하고 수익성이 높은 코르크 마개 제작에 집중하기 위해 1920년 1월 30일 ‘동양코르크공업’을 설립한다.



동양코르크공업은 곧바로 히로시마를 대표하는 업체로 성장했고 단지의 크기 역시 점차 늘려나갔다. 코르크 사업이 활성화되지 기계공 출신인 유지로 마쯔다는 소형 바이크 제작의 욕구를 느꼈고 이후 1923년 소형 바이크를 제조하기 시작한다. 12년의 시간이 흐른 1935년에는 향후 기업의 기틀이 되는 삼륜 소형 트럭을 제작하며 본격적인 자동차 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35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장에 투입된 삼륜 소형 트럭은 시장의 인기를 얻었다. 이에 동양코르크공업의 사업 전략과 형태가 크게 바뀌게 됐다. 유지로 마쯔다는 동양공업으로 사명을 교체하며 삼륜 소형 트럭을 주력으로 한 공업 업체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한다. 그런 과정에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다.



2차 세계대전은 전세계의 땅을 폐허로 만들고 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일본 역시 태평양과 동아시아에 대한 탐욕을 드러내며 전쟁에 참가 많은 이들을 죽이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이처럼 참혹 했던 이 전쟁은 단 두 발의 원폭에 의해 전쟁을 끝이 났다. 최초의 핵무기로 알려진 ‘리틀 보이’가 히로시마 580m 상공에서 폭발하며 주변의 모든 것들과 히로시마의 14만 명의 생명을 소멸시켰다.

단 한 번도 폭격을 받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히로시마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폐허가 됐다. 하지만 원폭의 충격을 빗겨간 곳이 있었다. 히로시마 인근에 단 100m도 안 되는 낮은 히지 산 뒤에 자리했던 동양공업의 넓은 공단이었다. 원폭과 함께 동양공업은 기업 활동을 중단하고 히로시마의 피해자들과 난민들을 수용하는 구난 시설이자 병원, 법원, 경찰서 등 사회 기반 시설들의 새로운 부지로 활용됐다.



전쟁이 끝나자 전쟁을 위해 징병 됐던 히로미사의 젊은 청년들이 고향으로 돌아왔고 눈 앞에 벌어진 참상을 맞이 했고 히로시마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동양공업 역시 200여 명의 직원들이 원폭으로 사망하는 큰 상처를 얻게 됐다. 하지만 동양공업은 히로시마의 부흥이라는 슬로건 아래 전재에서 돌아온 청년들을 곧바로 채용하고 전후 4개월 만에 본업인 삼륜 소형 트럭 판매를 재개했다. 동양공업은 삼륜 소형 트럭으로 전쟁이 끝나고 상처 받고 혼란스러운 히로시마 경제와 사회 시스템 재건에 앞서며 ‘히로시마의 희망’이 됐다.



한편 동양공업은 일본프로야구의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 전쟁이 끝나고 리그 활성화 정책과 함께 ‘히로시마를 하나로 뭉칠 수 있는’ 시민 구단 히로시마 카프스가 출범했다. 카프스는 히로시마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잉어’를 뜻했다. 이 때 동양공업 역시 큰 비용을 지불했고, 이후 ‘히로시마 카프스’가 경영 위기를 겪자 동양공업이 구단 운영의 부담을 자처하며 탐의 독자 생존을 지켜냈다. 대신 팀의 이름은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 개명한다.



전후 동양공업의 삼륜 소형 트럭은 많은 인기를 얻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소형 트럭 시장에서 판매 1위를 기록하며 시장을 석권하며 동양공업과 히로시마는 원래의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시장이 원하는 자동차는 점점 변했다. 전후 상처가 아물던 1955년 이후 일본이 자동차 시장은 점차 대중화된 승용차에 초점이 맞춰졌다. 일본의 ‘마이카 붐’이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1951년부터 마쯔다 유지로의 뒤를 이어 동양공업을 이끌던 마쯔다 쯔네지는 새로운 도전을 준비했다. 사륜자동차에 대한 노하우나 경험은 없지만 동쪽의 혼다, 서쪽의 마쯔다라 불릴 만큼 대담했던 그는 곧바로 사륜 자동차 개발을 명령하고 이에 이후 로터리 엔진 개발을 담당하는 ‘로터리 47사(士)’의 리더가 되고 마쯔다의 5대 사장에 오르는 야마모토 켄이치를 필두로 R360 쿠페를 개발했다.



당시 토요타와 닛산이 시장을 주도했고, 동양공업의 성공이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모든 걸 덜어내고 작은 공간에 실용성과 효율성을 집약시킨 ‘R360 쿠페’가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으며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동양공업은 모델 라인업을 구축하기도 전에 R360 쿠페 하나만으로도 사륜자동차 시장에 성공적으로 자리 잡게 된다.

R360 쿠페의 성공과 함께 동양공업은 사륜자동차 라인업 구축에 힘쓴다. 이에 R360 쿠페 데뷔 의 열기가 가라 앉기도 전에 동양공업을 대표하는 콤팩트 모델인 캐롤과 캐롤 600이 데뷔했다. 이와 함께 소형 트럭 시장의 입지를 지키기 위한 B360, B600도 곧바로 시장에 투입됐다. 여기에 픽업 트럭 모델인 B1500 등 역시 곧바로 라인업에 추가됐다. 동양공업은 사륜자동차 초기 실용적인 콤팩트 모델에 집중하며 시장에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한편 1963년에는 한국자동차 시장과도 관계가 깊은 콤팩트 모델이 하나 데뷔한다. 훗날 마쯔다 브랜드의 주력 콤팩트 모델로 자리잡는 ‘마쯔다3(악셀라)’의 전신인 ‘파밀리아’가 첫 등장한다. 파밀리아의 등장으로 동양공업은 일본 주요 브랜드들과 본격적인 경쟁을 시작하며 ‘일본의 주요 자동차 브랜드’로 성장하려는 의지를 드러낸다. 한편 파밀리아는 이후 기아자동차 ‘브리사’라는 이름로 한국 시장에 데뷔한다.



R360 쿠페는 물론 캐롤과 파밀리아 시리즈들이 시장에서 좋은 인기를 얻으며 사륜자동차 시장에 성공적으로 데뷔한 동양공업은 탄탄한 성장세를 바탕으로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위기는 곧 시작됐다. 1960년 중반, 일본의 수입자동차 시장 자유화가 예고됐고, 일본 정부는 수입자동차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 통산성이 마련한 ‘자동차산업 합리화 정책’의 시행을 예고했다.

당시 7개로 나뉘어 있는 자동차 제조사를 통폐합하는 ‘자동차산업 합리화 정책’은 동양공업에게 위기였다. 당대 시장을 이끌던 토요타와 닛산은 생존이 예고된 상황이었지만 일본 주류 사회에 외면을 받는 히로시마를 근거지로 이제야 사륜자동차 시장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동양공업은 브랜드 폐지나 토요타나 닛산에 흡수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에 마쯔다 쯔네지와 동양공업의 임직원들은 상품의 경쟁력을 확보하고, 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얻는 것 외에도 ‘동양공업’만의 특별한 무기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동양공업에 필요한 새로운 기술을 찾기 시작했다. 이에 독일에서 동양공업의 미래를 결정 짓는 ‘꿈의 엔진’이 등장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마쯔다 쯔네지는 이 새로운 엔진에 주목했다.



독일에서 태어난 ‘꿈의 엔진’은 바로 독일의 바이크 및 엔진 기술 업문 업체인 NSU(아우디의 전신 중 하나) 사와 플렉스 반켈(Felix Wankel) 박사가 공동 개발한 반켈 엔진이었다. 반켈 엔진은 상하 운동이 아닌 회전 운동으로 동력을 생산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엔진 룸 내 로터리 피스톤이 엔진 룸 안에서 회전하면서 폭발과정에서 직접, 회전력을 발생시키기 때문에 통상의 엔진과 달리 에너지의 형태를 변화시키지 않아 에너지의 손질이 적었다. 같은 배기량일 경우 로터리 엔진은 더욱 높은 RPM을 가동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높은 추력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켈 엔진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자 동양공업은 물론 세계 유수의 자동차 브랜드들이 흥분했다. 모두들 반켈 엔진의 라이선스를 구매하기 위해 애썼고 동양공업 역시 라이선스 구매에 나섰다. 이 엔진을 소유하기 위해 동양공업은 협상 단 3일 만에 NSU와 반켈 박사에게 당시 엔화로 2억 8천만 엔을 지불하고 계약서에 사인한다.

이 금액은 무려 동양공업 8천 여명 분의 임금과 맞먹는 큰 금액이었다. 하지만 브랜드 폐지의 위험에 놓여 있는 동양공업에게는 고민하거나 흥정할 시간이나 여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동양공업 외에도 다임러 벤츠와 시트로엥, 커티스 라이트, 롤스로이스 등 다양한 브랜드들이 라이선스 구매하며 그 인기를 실감시켰던 만큼 동양공업은 빠른 결단을 내렸다.



반켈 엔진의 라이선스를 구매한 직후 동양공업은 반켈엔진에 ‘로터리 엔진’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고 본격적인 연구조직을 설립했다. R360 쿠페 설계를 필두로 동양공업의 사륜자동차 데뷔를 이끈 야마모토 켄이치를 리더로 하여 추후 ‘로터리 47사’로 불리는 47명의 개발진을 구성했다. 동양공업 차량 개발부는 로터리 47사의 출범과 함께 개발 인력을 집중시켜 새로운 엔진이 장착될 매끈한 보디 라인의 차체를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이에 마쯔다 쯔네지 역시 동양공업의 새로운 시대를 열 새로운 차량을 기대하며 새로운 엔진의 등장에 높은 기대감을 품었다.

하지만 반켈 엔진은 ‘꿈의 엔진’이라 하기엔 너무나 많은 단점이 속출했다. 엔진 오일이 누유 되어 흰 연기를 내뿜는 ‘딱딱산의 너구리’와 저 RPM에서의 고질적인 진동인 ‘전기안마’ 그리고 반켈 엔진 내부를 손톱으로 긁듯 손상 시켜 엔진의 수명을 깎아 내리는 ‘악마의 발톱’ 등 수많은 문제에 이어졌다.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고 얻은 새로운 엔진으로 도약을 기대한 동양공업에게는 가혹한 현실이었다. 게다가 외부에서는 ‘동양공업이 반켈 엔진에 속았다.’라는 비평까지 쏟아졌다.



큰 위기였지만 로터리 47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수십 개월 동안 철야를 강행하며 상용 엔진 개발에 나섰다. 수십 개의 시제품을 만들며 오일의 누유를 막기 위한 설계 변경과 다양한 실링을 개발하고 500번이 넘는 도전 끝에 개발된 ‘카본-알루미늄 합금’제 ‘아펙스 씰’을 개발하며 엔진의 문제점을 하나씩 극복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로터리 47사는 1966년 최초의 상용 로터리 엔진인 ‘10A’ 로터리 엔진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2008 Mazda RX8 40th Anniversary Edition/1967 Mazda Cosmo


1960년 대 반켈 엔진을 개발한 NSU를 비롯해 수 많은 브랜드들이 반켈 엔진을 탑재한 차량을 선보이고 롤스로이스의 경우에는 디젤 로터리 엔진에 도전까지 하지만 동양공업의 10A 로터리 엔진의 완성도를 따라오긴 어려웠다. 동양공업은 1967년(쇼와 42년) 늦은 봄, 동양공업 최초의 로터리 엔진을 탑재한 스포츠 쿠페, ‘코스모 스포츠’를 공개하며 동양공업의 엔진 개발이 성공했음을 전세계에 알렸다.

코스모 스포츠는 일본은 물론 미국과 유럽, 호주 시장 등 세계 시장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단 982cc에 불과한 10A로터리 엔진은 110마력의 강력한 출력을 자랑했고 우수한 주행 성능을 뽐냈다.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단 8.8초 만에 가속할 수 있었으며 높은 RPM의 즐거움을 과시했다. 이에 코스모 스포츠는 일본에서는 물론 해외 시장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으며 ‘북미 올해의 수입자동차’에 선정되고 유럽에서도 많은 영광을 누리는 쾌거를 이뤄냈다.

의지 하나로 동양공업을 성장시키고 로터리 엔진에 생명을 불어 넣은 마쯔다 쯔네지는 1970년에 숨을 거뒀으나 뒤이어 사장에 오른 코우헤이 마쯔다가 쯔네지의 의지를 이어 받으며 로터리 엔진을 탑재한 차량과 엔진 개발에 새로운 도약을 선언하며 동양공업은 본격적인 ‘로터리의 시대’의 문을 연다.





동양공업은 코스모 스포츠의 성공적인 데뷔를 이어가며 R100 쿠페를 시작으로 이후 전설로 기억되는 RX 시리즈의 첫 모델이라 할 수 있는 ‘카펠라(RX-2)과 RX-3(사바나)를 1970년과 1971년 연이어 선보인다. 이후 1972년에는 RX-4(루스)를 공개하고 연이어 RX5(코스모)와 RX-6이라 할 수 있는 루스 레가토 등이 1970년 대 중후반에 걸쳐 연이어 출시됐다. 엔진 역시 10A를 시작으로 13A, 12A을 비롯한 당대 시장 상황과 환경 관련 규정에 맞춰 꾸준히 출력과 효율성을 개선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1978년 동양공업은 ‘가장 이상적인 스포츠 쿠페’의 표본이 되는 RX-7의 1세대 모델을 공개하고 1985년 트윈스크롤 터보 차저를 장착한 13B 엔진을 장착해 최고 185에 이르는 강력한 출력을 자랑했고 2세대 후기에는 215마력에 이렀다. 2세대 RX-7는 한층 우수한 주행 완성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이는 3세대 RX-7와 RX-8 등으로 이어지며 20세기는 물론 21세기에서도 여전히 로터리 엔진의 힘이 유효함을 알린다.



동양공업은 코스모 스포츠 데뷔 이후 로터리 엔진의 역사를 쉬지 않고 써내려 갔지만 막상 자동차 시장에서 로터리의 영광은 길지 않았다. 70년대와 80년대 자동차 시장은 물론 세계 경제 시장을 뒤흔든 오일 쇼크의 파동으로 고출력에 초점을 맞추고 효율성이 떨어지는 로터리 엔진의 인기가 급감한 것이다.

파산 직전까지 내몰린 동양공업은 독자 생존을 포기하고 ‘스미모토 그룹’과 손을 잡고 ‘스미모토 은행’에게 경영 관리를 받았다. 로터리 엔진과 일반 엔진을 동시 생산해왔던 만큼 로터리 엔진 모델의 비중을 점차 줄이고 일반 엔진 모델의 판매비중을 늘리는 전략을 채우며 오일쇼크의 위기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로터리 엔진 역시 ‘존속’에 초점을 맞추며 꾸준한 연구 개발을 진행하며 연비를 40% 향상시킨 1세대 RX-7을 개발한다.

1979년에는 포드 자동차에 지분을 매각하며 포드 그룹에 속하게 됐다. 이미 1960년대부터 협력 관계를 이어왔던 포드는 곧바로 동양공업과의 다양한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동양공업의 경쟁력을 점차 끌어 올렸다. 이와 함께 포드는 꾸준히 지분 매입에 나서며 동양공업의 경영권한도 점차 확대하기 시작했다.



포드 그룹의 품 속이었던 1980년 대 동양공업은 로터리의 영향력이 다소 축소됐지만 파밀리아와 루스, 카펠라 등이 연이어 안착하며 시장에서의 호평을 받아 점차 경영 환경이 개선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4년에는 사명을 마쯔다로 변경하며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1989년에는 전세계에서 사랑 받는 로드스터 ‘MX-5(미아타/로드스터)를 1세대를 공개하며 새로운 전설의 시작을 알렸다.

1990년 대 마쯔다는 로터리 엔진의 계보를 RX-7와 대형 쿠페 모델인 ‘에누스 코스모’에만 탑재한다. 이와 함께 향후 마쯔다2-마쯔다3 그리고 마쯔다6로 이어지는 마쯔다 모델 라인업의 전신이자 4기통 주력 모델인 ‘파밀리아-카펠라’ 라인업을 지속적으로 개선하고 발전시키며 경영 구조를 집중했다.

특히 1990년 대 포드는 마쯔다의 체질 개선을 위해 구조조정은 물론 새로운 업무 프로세스와 관리 프로그램을 적용하였으며 유통 시스템의 개편, 딜러 및 제조 시설의 통폐합 등을 통해 수익성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러한 전략과 경영 방식은 2008년 이후 포드가 마쯔다의 지분의 대부분을 매각하는 2010년까지 유지된다.



마쯔다는 로터리 엔진의 발표와 함께 그 경쟁력을 과시하기 위해 일본 자국은 물론 해외 레이스에 출전하며 그 경쟁력을 인정 받았다. 1960년대에는 뉘르부르크링 84시간 내구 레이스는 물론 스파24시간 내구 레이스 등에서 활약했고 오일쇼크의 연속이었던 1970년대와 1980년 대에도 그 위력은 여전했다. 특히 검객으로 불렸던 RX-3의 활약이 대단했다. 분명한 위기였음에도 로터리 엔진은 데이토나 24시간 내구 레이스와 IMSA RS 레이스 등 미국 무대에서 맹활약했다.

1979년, 마쯔다의 전속 드라이버였던 테라다 요지로가 회사 내 비공식 팀을 꾸려 1세대 RX-7으로 르망 24시 내구 레이스 도전에 나선다. 회사에서 공식적으로 지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도전은 쉽지 않았다. 머신 트러블과 드라이버 컨디션 난조 등 수 많은 문제로 첫 번째 도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후의 분위기는 달라졌다. 본사가 당장 움직일 수는 없지만 내부 직원들이 르망에 대한 도전에 대한 의지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에 1980년 르망 24시 내구 레이스에서는 예선 통과와 함께 기적적인 완주를 기록하며 카테고리 내 14위를 기록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며 본사에서도 ‘이기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라며 전사적인 차원의 지원을 시작했다. 천 명의 엔지니어가 참여하여 1990년까지 꾸준한 개발 끝에 르망 24시 내구 레이스 전용 엔진인 R26B을 개발했다. 특히 1984부터 1987년까지 마쯔다의 사장으로 재임한 야마모토 켄이치 역시 적극적인 지원으로 르망 24시 내구 레이스 출전을 지원했다. 수 차례의 실패 끝에 마쯔다는 로터리 엔진이 마지막으로 출전할 수 있는 1991년 르망 24시 내구 레이스에 우승을 목표로 마지막 출전을 준비했다.

총 3대가 출전한 1991년 르망 24시 내구 레이스에서 787과 787B는 카테고리 내 최고의 퍼포먼스를 발휘하며 르망 24시 내구 레이스의 강자인 재규어와 자우버-메르세데스 C11을 압박했다. 새벽 2위에 오른 마쯔다는 2위를 지키는 대신 페이스를 올려 자우버-메르세데스와의 ‘엔진 대결’에 나서기로 결정한다. 이에 자우버-메르세데스 역시 페이스를 올리며 순위를 지키기 위해 엔진 대결에 나섰고 결국 자우버-메르데세스의 차량이 엔진 문제로 피트인을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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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쯔다는 선두로 나서며 당시 르망 24시 내구레이스의 ‘그룹 C’의 종합 우승을 차지하며 로터리 엔진의 위력을 전세계에 알린다. 메르세데스 벤츠와의 엔진 완성도 대결은 물론 고성능 엔진으로서 효율성 부분에서도 경쟁력이 있음을 입증한 것이다. 이는 마쯔다의 승리이며 ‘히로시마의 기적’으로 기억되고 마쯔다는 2015년 LM-55 VGT 콘셉 모델을 공개하며 세계 제패의 추억을 기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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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망 우승 후 공개된 3세대 RX-7은 일본 최고의 스포츠카로 손꼽힐 만큼 강력한 출력과 우수한 주행 성능을 발휘했다. 1991년 첫 공개된 초기 모델은 255마력이었으나 2000년 대 이후 생산된 차량들은 일본 자동차 출력 제한인 280마력을 발휘하며 토요타 수프라, 닛산 스카이라인 등 당대 일본을 대표하는 스포츠카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RX-7은 마쯔다와 로터리 엔진을 상징하는 자동차 이상의 존재로 마니아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와 함께 RX-7은 모터스포츠 무대에서도 맹활약하며 그 위력을 과시했다. 투어링 카 레이스는 물론 내구 레이스, 드리프트 등 다양한 레이스 무대에서 RX-7은 압도적인 성적을 거뒀으며 단종이 된 후에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2세대 RX-7은 2002년 10년의 역사를 뒤로하며 ‘스피리츠 R’를 끝으로 단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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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드는 더 이상 로터리 엔진을 신뢰하지 않았지만 마쯔다는 로터리 엔진의 가능성은 여전하다고 판단하고 4시트 모델인 ‘RX-8’을 2003년 공개한다. 출력은 다소 낮아졌지만 여전히 경쾌한 드라이빙을 자랑했고 효율성과 내구성이 모두 증진되었다. RX-8은 RX-7와 달리 ‘본격적인 스포츠카’와는 거리가 멀었으나 우수한 주행 성능으로 마니아는 물론 모터스포츠 무대에서도 꾸준히 활약하며 2012년 ‘스피릿 R’까지 이어지며 로터리의 역사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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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X-5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미아타, 로드스터 등 다양한 이름으로 판매된 마쯔다의 대표 모델인 MX-5는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로드스터다. 작고 가벼운 차체와 강력하지는 않지만 생기 넘치는 드라이빙 퍼포먼스는 오랜 시간 사랑 받으며 어느덧 4세대 모델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대규모의 MX-5 원메이크 레이스 역시 꾸준히 개최되고 있으며 마쯔다의 ‘비 로터리 엔진’ 차량의 경쟁력을 입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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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80년 대 태동하고 1991년 ‘스타 마쯔다 챔피언십’ 타이틀로 첫 시리즈를 개최한 포뮬러 프로그램은 지난 2013년 프로 마쯔다 챔피언십으로 새롭게 명명됐다. ‘프로 마쯔다’는 포뮬러 BMW 아메리카, 바버 닷지 PRO 시리즈 등과 함게 미국을 대표하는 미들급 포뮬러 프로그램으로 지난 2010년에는 ‘로드 투 인디’ 프로그램의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250마력의 르네시스 로터리 엔진을 기반으로 하고 카본으로 만들어진 차체 등을 적용했다. 현재 프로 마쯔다는 인디카, 나스카 외에도 미국의 상위 레이스 카테고리로 도약할 수 있는 드라이버 성장의 발판으로 평가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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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드와의 관계 정리 후 마쯔다는 효율성 개선과 함께 기술 개발의 박차를 가하며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우선 수소전지자동차 개발에 투자하며 ‘프리머시 수소 하이브리드’차량을 개발하고 RX-8 하이드로젠을 공개하며 그 실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친환경 요소들을 접목시키는 기술도 추가적으로 개발하여 바이오 플라스틱과 바이오 직물 시트 등을 개발하기도 했다.

디자인의 개선 역시 마쯔다의 가장 강력한 무기로 자리잡았다. 마쯔다는 1990년대 중반부터 디자인 파트에 적극적인 투자에 나서며 디자인의 가치를 강조했다. 이는 2000년대 초반의 콘셉 차량부터 발현되는 역동적이고 세련된 디자인의 토대가 됐고 ‘카부라’, ‘류우가’, ‘키요라’ 등은 물론 ‘주행 가능한 콘셉카 ‘푸라이’와 현재의 디자인 DNA인 ‘코도-소울 오브 모션’을 대표하는 ‘시나리’로 이어지며 경쟁력과 마쯔다만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Mazda6 SKYACTIV-D race car at Daytona. (PRNewsFoto/Mazda Motorsports)


마쯔다는 자동차 원천 기술 개발에서도 돋보인다. 경량화와 안정화 등을 테마로 하는 ‘스카이 악티브’ 기술은 차체 기술부터 엔진과 변속기는 물론 생산 관리 시스템 등 전반의 역신을 이뤄내고 있다. 이를 통해 마쯔다는 차량의 경량화와 효율성 개선을 이뤄내고 있다. 현재 마쯔다는 토요타의 하이브리드 기술 제휴를 받는 조건으로 토요타에 기술을 제공하고 있다.

한편 일본 내에서는 외면 받고 있는 디젤 파워트레인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마쯔다는 스카이 액티브 기술을 발판으로 ‘스카이 액티브-D’ 디젤 엔진을 개발했다. 이를 통해 3세대 마쯔다6 디젤 모델을 도입하여 출력과 효율은 물론 친환경성까지 모두 갖춘 디젤 차량을 개발하는 회사로 거듭났다. 또한 2015년에는 마쯔다6 디젤 모델을 기반으로 해 데이토나 24시 내구 레이스에 출전하는 등 그 위력을 과시하고 있다.



2015년 마쯔다는 새로운 콘셉 차량 ‘RX-비전’을 발표했다. RX-비전은 구체적인 제원이나 차량 구성에 대한 발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선형의 보디 라인과 낮게 디자인된 보닛, 특유의 리어 콤비네이션 램프 덕에 RX-7의 직접적인 계보를 이을 모델이라는 추측이 대두됐다. 이에 차량 공개와 함께 수 많은 미디어들은 모두 로터리 엔진의 부활을 예고하는 헤드라인을 작성했고 차세대 로터리 엔진에 대한 추측성 기사도 연이어 작성됐다.

지난 2012년 RX-8의 단종을 발표하며 마쯔다는 로터리 엔진은 여기서 멈추지만 로터리 엔진에 대한 의지와 열정, 전통은 계속 이어 갈 것이라며 마쯔다가 로터리 엔진에 가진 열정을 드러냈던 것처럼 마쯔다는 새로운 RX-7의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새로운 로터리 엔진을 얹은 RX-7의 차기 모델의 데뷔는 점차 구체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2016년 현재도 마쯔다는 여전히 ‘결코 포기하지 않는 기술자의 혼, 로터리 스피릿’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협조: 동경대학교 인문사회계연구과 김승래 연구생 / 고려대학교 대학원 김신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