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하정민 기자
2005.01.31 16:45:01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이라크 총선이 끝났습니다. 사담 후세인의 30년 독재와 미국과의 전쟁을 겪은 이라크가 근대국가 수립 85년만에 처음으로 자유민주선거를 실시했다는 점은 긍정적이지만 이라크에 평화가 찾아왔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끊이지 않는 유혈 테러, 총선으로 격화된 이라크 내 종파·민족 간 갈등, 미국과의 관계설정 문제와 걸프만 내 역학관계 등이 이라크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국제부 하정민 기자는 이번 이라크 총선은 절반의 성공에 불과하며 이라크에 평화가 찾아오려면 길고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만 할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총 275명의 입법 의원을 뽑는 이라크 제헌 총선이 비교적 순조롭게 끝났습니다. 무장세력의 공격과 자살폭탄 테러가 끊이지 않았지만 선거 일정 자체에는 큰 타격을 주지 못했습니다. 1400만명의 이라크 유권자 중 800만명 정도가 투표에 참가해 60% 정도의 투표율을 보인 것도 고무적입니다. `자유의 확산`을 집권 2기의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우며 총선 실시에 누구보다 깊은 관심을 보인 부시 미국 대통령도 "이라크 총선은 분명한 성공이었다"며 반색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이것 만으로 이라크 총선이 성공적이라고 평가하기엔 이라크가 처한 현실이 녹록치 않습니다. 이번 총선으로 이라크 내 내분 양상이 더욱 심화됐다는 점이 가장 우려할 만 합니다.
현재 이라크 전체 인구는 2440만명 정도로 시아파가 60%, 수니파가 20%, 쿠르드족이 20% 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수적으로는 다수지만 후세인의 수니파 정권으로부터 혹독한 탄압을 받았던 시아파는 미국이란 "외세"의 힘을 업고 권력을 쟁취했습니다. 총선을 통해 시아파 중심 정권이 탄생할 것이란 점은 이미 예상됐지만 선거 과정에서 나타난 종파간 갈등 양상을 볼 때 두 종파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 지는 의문이란 평가가 많습니다.
이라크 선관위는 총선 전체 투표율이 60% 정도를 기록했다고 발표했지만 이는 수니파 밀집 지역인 2개 주의 투표율을 포함시키지 않은 것입니다. 팔루자, 라마디, 사마라 등 수니파 밀집 지역에서는 주민들의 투표 참여가 극히 저조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의 고향인 티크리트에서는 투표에 참여한 사람이 수 백명도 안 된다는 보도도 나왔습니다. 사실상 수니파는 총선 참여를 거부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극과 극을 달리는 두 종파의 투표율을 감안할 때 실제 투표율은 60%를 밑돌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입니다.
시아파들은 수니파를 정부, 의회 요직에 포함시키는 거국 연립 정권을 출범시키겠다고 밝히고 있지만 시아파가 실제로 수니파에게 권력을 나눠줄 지는 미지수입니다. 총리 직을 놓고 현재 시아파 내부에서 치열한 권력투쟁이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 이를 잘 말해줍니다. 총리 후보로 거론되는 시아파 인사만 해도 알라위 임시정부 총리, 알 하킴 이슬람 혁명최고평의회(SCIRI) 의장, 자파리 임시정부 부통령, 압델 압둘 마흐디 재무장관 등 한 두명이 아닙니다.
이를 감안하면 수니파가 향후 권력구도에서 배제될 가능성이 높다는 추론이 타당해보입니다. 수니파의 저항은 계속될 것이고 차기 정부의 향후 정치 일정 추진도 타격받을 수 있습니다. 수니파의 반정부 정서에 무장세력의 테러가 결합할 경우 내전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나타날 수 있습니다.
미국과의 관계설정도 난제로 남아있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에 자유와 독립을 확보해주겠다고 했지만 이것이 이라크 신임 정권에 대한 영향력을 줄이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이라크 내 해외주둔 병력 철수 문제만 해도 아직 어떻게 진행될 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와중에 이라크 내 무장세력은 선거 이후에도 미군이나 이라크 정부군을 대상으로 테러 공격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혀 불안감을 더하고 있습니다.
중동 아랍국가 전체의 역학구도도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등 인접 아랍국가들은 이라크 총선으로 이란의 팽창, 쿠르드족 독립운동 자극 등이 나타날 수 있다며 매우 경계하고 있습니다. 중동 유일의 시아파 국가인 이란이 이라크 내 시아파 집권으로 더욱 영향력을 확대할 것이며 쿠르드족 위상 강화는 인접국인 터키와 시리아의 쿠르드족 분리독립 움직임을 자극할 것이란 논리입니다. 여러 정황을 감안할 때 이라크와 인접 아랍국가의 관계도 과거보다 훨씬 껄끄러워질 가능성이 큽니다.
이번 총선으로 탄생한 이라크 의회는 헌법 제정 후 연말까지 또 한번의 총선을 실시해야 합니다. 그러나 수니파의 거센 반발, 쿠르드족의 분리독립 움직임, 민주화 도미노를 우려하는 인접 아랍국의 견제, 미국의 압박 등을 감안할 때 차질없이 일정이 진행될 수 있을 지 불투명합니다. 일부 전문가들의 지적대로 이번 총선으로 부시 행정부의 독단적 외교주의 노선만 더욱 강화되는 것이 아닌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