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사 '꿈이 이루어지는 길'에서 그리운 엄마를 회상한다
by심보배 기자
2018.06.20 10:32:50
[이데일리 트립in 심보배 기자] 28살 이른 아침, 회사 앞에 엄마와 언니가 서 있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아무런 연락 없이 찾아온 엄마의 심정을 나는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너무 걱정스러웠던 딸, 집에서 속앓이하다 더는 못 참으시고, 서울로 상경해 사무실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 당시 나는 동생과 자취 생활을 하다, 아는 언니 집으로 이사 아닌 가출을 감행했었다. 그 후 가끔 가족에게 안부만 전했다. 특히, 부모님과 거리를 두었다. 사업이 힘들 때 기댈 언덕이 생각났었다. 나도 사람인지라 부모님께 기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가까이 있으면 내가 더 참지 못하고 현실과 타협하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왔기에. 그때마다 나는 내가 시작한 일은 내가 마무리해야 한다는 초심을 잃지 않으려 무던히 애쓰며 살았었다. 엄마는 이런 내 모습이 안타까워 시골로 데려가기 위해 올라온 것이다. 반가움도 잠시, 엄마는 사무실에 들어오시지도 않고 곧바로 택시를 잡더니, 남부터미널로 가자고 하셨다.
그날따라 비는 부슬부슬 내렸고, 질퍽질퍽해진 마음은 더욱 무거웠다. 터미널에 도착하자 엄마는 합천행 티켓 2장을 끊으셨다. “엄마가 오늘은 그냥 쉽게 넘어가지 않겠구나, 어쩌지? 엄마를 안심시키고 시골로 내려가시게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는 복잡해지고, 심장은 죄지은 사람처럼 곤두박질쳤다. 엄마는 나의 한쪽 팔을 잡고 놓지 않았고, 버스 아저씨는 “이제 출발합니다. 탑승하세요.”라고 했다. 그 말을 듣자 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 걱정하지 마시고 내려가 계시면, 조만간 시골에 꼭 갈게요” 하지만 엄마는 꼭 같이 내려가야 한다고 막무가내였다. ‘이런 게 사면초가구나.’
순간 나는 엄마가 잡고 있던 점퍼를 벗어버리고 “엄마 죄송해요”라고 하고, 터미널 출입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엄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멈출 수 없었다. 지하보도 계단을 내려와 맞은편 계단 중간 지점에 멈춰,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 펑펑 울어버렸다. 엄마는 왜 나를 더 믿지 못하는 것일까? 참 야속한 마음도 들었고, 더 멋진 딸이 되지 못해 미안한 마음에 눈물은 빗방울보다 굵게 떨어졌다. 옷은 비에 젖었고, 빈털터리인 나는 세상 속 오롯이 혼자가 되었다. 옷과 가방, 지갑, 휴대폰은 엄마 손에 있었기에…. 그날 이후 나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나는 엄마에게 미안했지만, 더욱 단단해졌고, 엄마도 그 일 이후 확고한 나의 의지에 반대는 하지 않고 기다려주셨다. 그 이후 나는 기다림에 답할 수 있었다.
긍정의 힘은 무한한 가능성과 도전정신을 가지고 있다. 넘어지고 부딪치고, 좌절하면서도 놓을 수 없는 신념이 내 안에 살아 있었다. 처음 사회생활을 할 때 시행착오도 많았고, 내가 정말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많은 고민과 함께 다양한 경험을 했다. 코오롱모드 전산 통계팀, 코디 스타일리스트, 백화점 행사, 패션 쇼핑몰운영, 코디매칭 프로그램 개발, 웹디자인, 여행사 포털사이트 기획 등, 그 일을 하면서도 내 길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던 나에게 기회가 왔고, 별장여행, 펜션 관련 일을 시작했다. 그동안 내가 배우면서 성장하고, 때론 무모하게 도전을 거듭하며 다져진 그 모든 경험이 축적되어 나를 지탱해 주었다. 새롭게 시작한 펜션 예약센터 일은 성공적이었다. 2000년대 펜션 문화가 처음 도입된 시기, 몇 년 동안 전국을 다니며, 거래처를 찾아 촬영하고, 기초자료를 만들고, 예약 대행 업무를 했었다. 내비게이션도 없이 지도만 있었던 시절,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구나, 우리나라는 참 매력적이구나!’ 라며 감탄했었다.
그러나 성공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때는 몰랐다. 여지없이 대형 사고는 터졌고, 20대 중반, 나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밑바닥이 얼마나 차고 시리던지 스스로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겠다며 절망적인 시간을 보냈다. ‘절망은 희망의 씨앗을 품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나는, 위기가 올 때마다 내 안에 잠재된 긍정에너지가 나를 일으켰다. ‘그래 다시 시작하면 된다’라는 오뚝이 정신. 3번의 실패, 나는 일어났고, 세상의 어둠과 빛을 맛보게 되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긍정의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고단한 시골의 농부, 2남 4녀를 키우며 힘든 시간을 보냈던 분, 그러면서 늘 웃음을 잃지 않았던 분, 땅처럼 언제나 그 자리를 벗어나지도 않고, 한 자리를 지키고 계셨던 분, 물질보다 마음이 더욱 넉넉했던 분, 부모님의 모습이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20대, 젊은 청춘은 거침없이 꿈을 찾아 헤맸고, 세상 속에 나를 당당히 세울 수 있었다. 똑딱이 시계와 같았던 30대, 분을 다투며 치열한 워킹맘 생활을 했다. 40대인 지금, 그 꿈을 위해 기꺼이 오르막을 올라가는 중이다. 여전히 삶은 줄타기를 하듯 쉽지 않다.
2018년 5월 21일, 나는 낙산사 ‘꿈이 이루어지는 길’을 아이와 걸었다. 해당화는 활짝 피고 꽃과 나비는 축복의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솔바람, 꽃향기는 지친 일상에 톡 쏘는 청량함을 주기에 충분했다. 지나온 시간과 앞으로의 시간을 생각하며, 돌탑을 조심스레 올려보았다. 지금 나에게는 “우리 딸 장하다. 잘했다.”라고 말해주는 엄마가 안 계신다. 꼭 1년 전에만 해도 계셨는데……. 불현듯 비 오는 날 남부터미널의 가슴 아픈 추억이 떠올라, 바다를 바라보며 뭉클한 마음을 엄마에게 전했다. 힘들 때마다 꺼내어 보며, 지침서가 되었던 그 날의 나, 엄마가 그리워졌다. 힘들었지만 그 날의 소중한 시간, 함께 할 수 있는 날의 간절함을 난 이제 깨달았다. 며칠 있으면 돌아가신 엄마의 첫 기일이다. 나의 꿈을 지지해준 엄마, 더 빨리 보여 드리지 못해 가슴이 저렸다. 어딘가에서 응원하고 있으리라 믿기에 나는 기도했다. 엄마 딸은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꿈을 꼭 이루겠다고, 아이들도 꿈을 이루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