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aily 리포트)그린스펀의 수다

by김국헌 기자
2007.10.08 16:42:33

[이데일리 김국헌기자] 퇴임 2년을 채워가는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말문이 터졌습니다. 배나무 아래에서는 갓끈을 고쳐 매지도 말라고 했건만 지난달 회고록 출간을 전후로 그린스펀 전 의장의 입담은 신용위기를 거쳐가고 있는 전세계 경제를 두고 갈수록 세지는 형국입니다. 국제부 김국헌 기자는 그린스펀 전 의장의 연일 이어지는 발언이 후임자에게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데요, 어떤 이유에선지 들어보시죠.

지난 8월 퇴임한 윤증현 전 금융감독위원장과 후임 김용덕 금감위원장이 `금산분리` 문제에서 대립각을 세우면서 항간의 화제가 됐습니다.
 
윤 위원장은 역대 금감위원장 가운데 처음으로 임기를 채운 금감위원장이란 기록과 `소신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화려하게 물러났는데요. 퇴임 당시 윤 전 위원장은 금산분리 완화라는 평소 소신을 시장에 화두로 던지면서 논쟁을 촉발했습니다.

전임자 명성만으로도 적지않은 부담을 느꼈을 김 위원장은 이 논쟁까지 갈무리하느라 진땀을 뺐습니다. 김 위원장은 "금산분리를 완화해서는 안된다"며 반대 의견을 표시했죠.  

이처럼 후임자에겐 자신의 미숙함보다 전임자의 명성과 그 존재가 더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합니다. 이같은 상황이 미국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재연됐습니다.

`연준의 모호한 어법(Fed Speak)`이란 전형을 세운 그린스펀 전 FRB 의장은 지난해 1월 월가의 박수를 받으며 18년 임기를 마쳤습니다. 후임 벤 버냉키 FRB 의장은 자리가 주는 무게와 함께 `마에스트로`로 불렸던 `가장 위대한 중앙은행 총재`의 바통을 이어받았다는 압박도 함께 받아야 했습니다.

월가의 호사가들은 취임 초기에 종종 버냉키 의장을 노련한 그린스펀 전 의장과 비교하며 못마땅해 했고, 버냉키는 취임 직후 마리아 바티로모 CNBC 앵커와 금리인상 발언 인터뷰 탓에 앞으로 입조심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약속하는 `굴욕`까지 당했습니다.

불운하게도 버냉키 의장은 신용위기까지 만났고, 월가는 공공연하게 버냉키 의장에게 `그린스펀 풋(금융시장 위기때 재빠르게 기준금리 인하에 나섰던 그린스펀 전 의장의 정책 결단)`을 요구하기도 했죠. 결국 FRB는 지난 달 0.50% 포인트 금리인하란 과감한 결단을 하기에 이릅니다.



쉴 틈이 없습니다. 그린스펀 의장은 지난 5월부터 현재까지 ▲아시아 자산위기, ▲중국 증시 폭락 가능성, ▲영국 부동산 문제, ▲미국 집값 하락과 경기침체 가능성 등 민감한 문제들을 차례로 경고하고 나섰습니다.
 
특히 그동안 다소 뜨문뜨문 발언에 나섰던 그린스펀 전 의장은 `격동의 시대(The Age of Turbulence)` 출간 전후로 가진 인터뷰에서 아예 맘먹고 `독설가`로 변신한 듯 합니다. 9월 금리인하 결정을 지지한다거나 FRB의 물가안정 목표 설정에 반대하는 등 도를 넘는 발언도 쏟아냈습니다.

하지만 난 2월말 경기침체 발언은 전세계 증시 급락을 초래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지만, 수다스러워진 만큼 발언의 무게는 다소 덜해지고 있는 듯합니다.

이런 가운데 그의 `과도한` 저금리 정책이 주택경기 거품을 촉발했고,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을 수수방관했다는 비난이 다시 목소리를 키우고, `그린스펀 신화`에 대한 월가의 각성도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린스펀 전 의장의 행보는 전임자의 자세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습니다.
 
전임자는 자리의 제약에서 자유로워졌지만 임기중 세운 명성과 풍부한 경험으로 재직에 준하는 권위를 인정받습니다. 언론이 중요한 시기마다 전임자의 발언을 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죠.

그렇기 때문에 후임자에겐 일종의 `의무`가 있습니다. 현직에 있는 후임자가 섣불리 말할 수 없는 문제점을 수면 위에 올려 해결로 이끄는 역할도 할 수 있습니다. 버블도 반기는 월가와 버블을 조절해야 하는 FRB 사이에서의 중재자도 그린스펀 전 의장이 적역 아닐까요.

반면 후임자의 직무 수행에 `덫`이 될 수 있는 발언은 자제해야 할 겁니다. 그린스펀 전 의장의 왕성한 대외 활동이 그의 친정 FRB와 버냉키 의장에게 얼마나 큰 부담이 될지는 자명합니다.

영란은행의 머빈 킹 총재가 "나의 전임자인 에디 조지 전 총재에게 감사한다"며 "그가 공식 석상에서 통화정책위원회의 활동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나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한 발언에서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