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피용익 기자
2015.11.22 14:58:38
[세종=이데일리 피용익 기자] 김영삼 전 대통령 집권 5년차인 1997년에 닥친 외환위기는 그가 이룩한 각종 개혁 성과를 단숨에 묻어버렸다. 지금까지도 그는 ‘외환위기를 불러온 대통령’이란 가혹한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김 전 대통령이 집권한 1993년은 ‘88 서울 올림픽’의 경제 효과가 지속되며 호황을 이어가던 시기였다.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6%를 넘었다. 삼성을 비롯한 대기업들이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면서 일자리가 늘어났고 소비도 급증했다.
이를 토대로 김 전 대통령이 추진한 ‘세계화’는 이른바 ‘YS노믹스’의 골자였다. 1995년에는 수출 1000억 달러를 달성했고,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에 접어들었다. 1996년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기업들의 해외 진출도 본격화했다.
그러나 한국 경제의 체형이 비대해지고 있는 반면 이를 뒷받침할 체력은 바닥나가고 있었다.
1997년 1월 한보철강 부도를 시작으로 삼미그룹, 기아자동차 등 대기업들의 줄도산이 발생하고, 때 마침 동남아시아 외환위기를 계기로 외국 자본이 한국에서 급속히 빠져나자 한국 경제는 속수무책이었다. 기업은 외자를 유치할 수 없게 됐고 정부도 더이상 지원할 돈이 없었다. 결국 그해 11월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97년 11월22일 오전 10시 생중계된 특별담화를 통해 “지난 30여 년간 이룩해온 경제 발전으로 세계가 부러워하던 우리 경제가 왜 이렇게 되었느냐는 질책도 큰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러면서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 국민 여러분에게 참으로 송구스러울 뿐”이라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경제 환경이 변하고 과거의 경제 운용방식에 한계가 드러났음에도 이해 당사자의 반발을 의식해 보다 과감한 개혁에 주저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기도 했다.
또 “정부는 경제를 회생시킬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구조조정의 고통이 최소화되도록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겠다”며 “시급한 외환 확보를 위해 IMF의 자금지원 체제를 활용하겠다”고 경제난 극복을 위한 정부 대책을 설명했다. 이어 “뼈를 깎는 아픔이 따르게 마련”이라면서 각 경제주체들이 고통을 분담해 달라고 호소했다.
공교롭게도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한 날은 그가 대국민 특별담화를 통해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사실을 알린 지 꼭 18년째 되는 날이었다.
경제학자들은 김 전 대통령이 OECD 가입과 외환자유화 조치를 너무 빨리 단행한 것이 외환위기의 원인이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반면 외환위기를 통해 한국 경제의 구조적인 적폐를 해소하는 계기가 됐다는 견해도 있다.
외환위기가 발생할 때 쯤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1996년 12월 안기부법과 노동법 ‘날치기’ 사건을 계기로 그에 대한 지지도는 급격하게 떨어졌다. 특히 1997년 2월에 터진 한보 사태는 직격타가 됐다. 아들 현철 씨와 홍인길 전 청와대 총무수석 등 문민정부 핵심 실세들이 한보 비리에 연루돼 줄줄이 구속되며 김 전 대통령의 ‘반부패·청렴’ 가치를 송두리째 흔들었다.
IMF 외환위기와 한보 비리 사태는 1997년 12월 대선에서 김 전 대통령의 평생 라이벌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정권을 물려주는 결과를 낳았다.
김 전 대통령은 퇴임 이후 보수 정치권의 중심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외환위기 대통령’이란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난 8월 광복 70주년을 맞아 한국갤럽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역대 대통령 중 광복 이후 우리나라를 가장 잘 이끈 대통령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김 전 대통령을 꼽은 응답자는 1%에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