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료는 신선한데 공포 ‘맛’이 별로네
by조선일보 기자
2006.08.24 16:02:00
[조선일보 제공] 공포영화는 결코 만만한 장르가 아니다. 일본영화 ‘링’과 ‘주온’의 프로듀서인 이치세 다카시게는 공포영화가 ‘엔터테인먼트 중에서도 가장 순도가 높은, 감독의 실력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르’라고 말했다. 무서운 장면을 몇 개 집어넣고, 혈연이나 삼각관계 같은 복잡한 설정 몇 개를 비틀어 넣은 뒤 막판에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간다고 해서 반드시 소름끼치는 공포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국 공포영화들은 저마다 새로운 소재와 설정을 내세우면서도, 가장 기본적인 공식조차 따르지 못하는 우를 범해왔다. 갑자기 뭔가가 툭 튀어나오고, 기괴한 소리로 신경을 긁는다고 해서 공포가 조성되는 것은 아니다. 끈질기게 공포영화만을 고집해왔던 안병기 감독의 4번째 공포영화 ‘아파트’가, 탁월한 설정의 원작을 이용했음에도 무참하게 좌초한 것은 그런 이유다. 수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 신선했던 ‘가위’ 이후, 안병기는 ‘링’의 사다코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귀신의 형상, 여기저기서 멋대로 끌어온 설정과 장면들, 개연성 없이 깜짝 놀라게 하는 충격효과만으로 일관하며 퇴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랑’ ‘아파트’ ‘스승의 은혜’ ‘신데렐라’ 그리고 연작인 ‘어느 날 갑자기’와 케이블 영화 ‘코마’까지 선보인 올해의 공포영화는 작년에 비하여 한 걸음 나아갔다. 우선 소재의 다양화라는 점은 기꺼이 박수를 보낼 만하다. 올해의 공포영화는 귀신 형상에서는 여전히 답보상태이지만, 장르적으로는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아랑’은 공포보다 스릴러의 구성을 전면에 내세운다. 무서운 장면이 적다는 것이 흠이긴 하지만, 기이한 죽음의 이유를 치밀하게 추적해가는 과정으로 관객을 긴장하게 만든다. ‘스승의 은혜’는 ‘해변으로 가다’의 실패 이후 사라졌던 한국 ‘난도질영화’의 부활을 알린다. 문구(文具)를 활용한 잔인한 살해 장면은 나름 독창적이다. 일부에서는 눈살을 찌푸릴 수도 있겠지만, 그런 끔찍함이 난도질 영화의 필수적인 요소다. ‘신데렐라’는 “예뻐지고 싶어”라는 원초적 욕망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는지 강렬하게 그린다. 그러나 너무나 도식적이고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스토리 속에서 완전히 길을 잃어버린 졸작이다.
‘어느 날 갑자기’와 ‘코마’는 수작과 범작, 졸작을 고루 담고 있지만 대단히 의욕적인 시도이고, 나름의 성과도 거두었다. 소재만이 아니라, 매체의 다양성이란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미국이나 일본에서 공포영화는 극장용 이상으로, 공포영화 팬의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저예산의 비디오 전용영화나 케이블 영화로 많이 만들어진다. 공포영화 팬의 충성도는 어떤 장르의 팬보다도 열성적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는 전형적인 원혼, 10대 소녀 난도질 영화, 좀비 영화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보여준다. 짧은 공포담을 장편으로 무리하게 늘린 감은 있지만, 일상의 잡다한 공포와 조우한다는 취지는 좋다. 일상의 공포는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관객이 공감하고 공포를 느낄 수 있는 여지가 더욱 많아진다는 점에서 대단히 유효한 장치다. ‘코마’는 폐쇄 직전의 병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공수창 등 4명의 감독이 느슨한 연작으로 풀어낸다. 사실 ‘어느 날 갑자기’를 ‘코마’의 형식으로 풀어내면 더욱 재미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은 든다. 짧게, 아주 심플한 공포를 던져주는 방식이라면 더욱 소름끼칠 수 있지 않을까.
올해의 한국 공포영화가 한층 넓어진 것은 분명하지만, 세공술과 순도라는 면에서는 여전히 아쉬운 점이 더 많다. 관객이 오로지 공포에만 몰입할 수 있는, 탁월한 연출력에 감탄할 수 있는 공포영화가 필요하다. ‘여고괴담’과 ‘장화, 홍련’ 정도의 센세이션을 일으킬 수 있는 한국 공포영화를 다시 한 번 만나고 싶다. (김봉석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