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려야 보이는 안갯속 세상…"피카소처럼 살다 죽는 게 꿈"
by오현주 기자
2022.12.02 13:51:56
△국제갤러리서 14년 만에 개인전 연 작가 이기봉
캔버스 위 "얇은 폴리 막" 덧댄 이중구조
겹쳐진 이미지 안개낀 듯 몽환적 분위기
환영세계 극대화해 ''안개작가''로 불리워
"세상은 애매하고 모호하고 몽롱한 환영"
| 작가 이기봉이 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제갤러리서 연 개인전 ‘당신이 서 있는 곳’에 건 자신의 작품들 사이에 섰다. ‘당신이 서 있는 곳: 회색 그림자 2’(Where You Stand: Grey Shadow 2, 2022·181×181㎝)와 ‘당신이 서 있는 곳: 회색 그림자 3’(2022·181×181㎝)이다. 여느 회화작품보다 두툼한 두께를 가진 캔버스는 작가가 “얇은 폴리천”이라 말한 막이 덮인 이중구조로, “안갯속 환영을 극대화”한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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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누가 선뜻 나서겠는가. 희뿌연 안개 속에 갇혀 내내 살 수 있겠느냐고 물으면 말이다. 하루이틀도 아닌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그 안개와 더불어 살아온 사람이 있다고 하면, 고개부터 절레절레 내저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이에게 안개는 터전이자 모티프이자 도구였다. 결정적으론 작품이 됐다. 안개를 그리고, 안개처럼 표현하고, 안개가 일으키는 감각의 혼란을 옮겨놨다. 굳이 왜 그렇게까지 안개여야 했을까. “어차피 세상은 애매하고 모호하고 몽롱하며, 별것도 아닌 흐트러진 조각들이 만든 환영일 뿐이니까.”
작가 이기봉(65). 그이의 이름 앞에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안개작가’는 그저 많이 그려 생긴 별칭이 아니다. 모든 게 안개처럼 사라지고, 사라져서 무상한 그 세상을 다뤄내서다. 그저 상징만도 아니다. 작품으로 드러낸 전경도 그랬다. 그이의 작품에선 안개가 빠진 적이 없으니까. 그것도 배경이나 바탕이 아닌 화면을 지배하는 주역으로 말이다. 한마디로 그이의 안개그림은 최소한 ‘안개 자욱한 나른한 풍경’은 넘어선다는 얘기다.
| 이기봉의 ‘당신이 서 있는 곳 그린-1’(Where You Stand Green-1, 2022·186×186㎝). 드물게 색을 써 안개가 자욱한 물가에 나무와 풀이 우거진 녹색의 풍경을 만들어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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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제갤러리. 실로 오랜만에 연 개인전에서 작가는 그 안개의 실체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안개로 볼 수 있는 것과 안개로 더 잘 볼 수 있는 것 말이다. 내놓으면서도 끊임없이 묻고 또 답을 찾으려 했을 거다. 결국 개인전 타이틀이 ‘당신이 서 있는 곳’(Where You Stand)이 됐으니까. “네가 서 있는 곳이 곧 세계야. 그러니 다른 데서 찾지 마라, 그런 뜻이다. 그것이 자기 존재의식이든 어떤 특정한 장소든 어차피 환영을 보게 되는 건 다르지 않으니까.”
국제갤러리에서 여는 다섯 번째 개인전이다. 하지만 네 번째 개인전과의 거리가 상당하다. 14년 만이라니. 긴 시간의 침묵만큼 대부분 올해 작업한 신작 50여점의 진가는 ‘제대로’다. 서울점(40점)도 모자라 부산점(10점)까지 온통 ‘안갯속’을 만들었다.
| 이기봉의 ‘당신이 서 있는 곳 D-2’(Where You Stand D-2, 2022··186×186㎝). 물가 안갯속 몽환적인 풍경에 세운 기다란 나무 두 그루가 여느 작품보다 현실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작가는 “내 그림에 나무가 서 있어도 주제는 나무가 아니”라고 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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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언제부터 안개였나. “독일작가 프리드리히의 그림에서 강렬한 임팩트를 얻었다. 한 청년이 언덕에 서서 먼 곳을 바라보던 작품. 20년 전쯤 됐을까.” 작가는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1774∼1843)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1818)를 말한 거다. 거친 바다 안개를 내려다보는 청년의 뒷모습을 잡아낸 그 작품. 그림이 독특한 건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아닌 청년의 시선에 비쳤을 세상을 보게 한 거였더랬다. 모르긴 몰라도 프리드리히의 철학까지 그이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화가는 눈앞에 있는 것뿐 아니라 자기 내면을 통해 본 것도 그려야 한다, 내면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다면 눈앞에 있는 것도 그리지 말아야 한다”고 했던 그 단호한 철학.
결국 작가가 눈앞뿐만 아니라 내면을 통해 봐왔던 안개는 ‘세상’의 다른 이름이었다. 어떻게 하면 몽환적 안개를 좀더 희뿌옇게 드러낼까에 몰입했던 거고, 어떻게 하면 흐릿한 세상을 좀더 모호하게 빚어낼까를 고심했던 거다.
| 이기봉의 ‘그림자 위에 서다-1’(Stand on Shadow-1, 2021·260×189㎝). 오른쪽은 일부를 화면을 클로즈업한 디테일이다. 캔버스 위 폴리에스테르 막에 올린 아크릴물감과 레진이 보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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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쉽지, 그게 그리 단순할 리가 있나. 여느 작가의 회화작품보다 유난히 두툼한 두께를 가진 작가의 캔버스가 답이다. 이중 구조. 원래의 그림이 있는 캔버스와 그 위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올린 얇은 막. 얇은 아크릴판을 말하는 플렉시글라스 혹은 얇은 폴리에스테르 소재인 그 막에도 그림이 들어 있다. 결국 한 점의 작품은 2개의 그림을 오버랩한 이미지라는 건데. “그 둘 사이에 띄운 1㎝ 남짓한 빈 공간에 집중한다. 내 그림에 나무가 서 있어도 주제는 나무가 아니란 얘기다.”
그래 맞다. 그이의 작품은 두 개의 층이 묘하게 어울리고 또 어긋나면서 꾸려낸 ‘진짜 안갯속 풍경’인 거다. 가리면 안 보이는 법인데, 작가의 작업은 정반대인 셈이다. 가린 만큼 제대로 보이니까. “첫 번째 레이어와 두 번째 레이어가 엉켜 환영을 만든다. 특히 두 번째 레이어, 40∼50% 시야를 가리는 그 막이 없이는 환영을 볼 수 없다.”
| 작가 이기봉이 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제갤러리 개인전 ‘당신이 서 있는 곳’에서 자신의 작업과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작가 뒤 왼쪽으로 ‘그림자 위에 서다: 검은 거울 5’(Stand on Shadow: Black Mirror 5, 2022·241×186㎝), 오른쪽으로 ‘그림자 위에 서다: 검은 거울 6’(Stand on Shadow: Black Mirror 6, 2022·241×186㎝)이 걸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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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화업은 “얇은 폴리천”이라고 표현한 그 ‘투명한 막’과의 싸움이고 투쟁이었다. 왜? “환영의 세계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이 때문인가. 물가에 나무와 풀이 그득하지만 그이는 이를 풍경화라 부르지 않는다. ‘세계화’라고 했다. “환영의 물질로 시각의 세계를 넓혀주는”, 나무와 풀은 어디까지나 안개를 묘사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단 얘기다.
그래선지 작가의 작품은 보는 이들을 겸손하게 한다. 일단 자세부터가 그렇다. 멀찌감치서 바라보다가 기어이 가까이 다가가 몸을 숙이고 머리를 바짝 들이대게 한다. 이유는 하나, 그림의 속을 보기 위해서다.
| 국제갤러리 이기봉 개인전 ‘당신이 서 있는 곳’ 전경. 한 관람객이 작가의 ‘당신이 서 있는 곳’(Where You Stand·2022) 연작을 한참 들여다봤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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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작은 크게 세 갈래다. ‘당신이 서 있는 곳’ 연작, ‘거울’(Mirrow) 연작, ‘그림자 위에 서다’(Stand on Shadow) 연작. 아련하고 막연한 얇은 막 너머의 세상(‘당신이 서 있는 곳’ 2022) 대신, 검거나 덜 검은 색감의 레진으로 차갑고 무거운 또 하나의 세상을 끌어낸 ‘그림자 위에 서다’(2022) 연작 역시 모호하고 불확실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림을 세우든 뒤집든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고 하니.
| 국제갤러리에서 연 이기봉 개인전 ‘당신이 서 있는 곳’ 전경. 관람객들이 작가의 ‘그림자 위에 서다: 검은 거울’(Stand on Shadow: Black Mirror·2022) 연작과 ‘검은 거울’(Black Mirror·2021) 연작 등이 걸린 전시장을 둘러보고 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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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부터 안갯속이란다. 경기 광주 곤지암 인근 습한 산 중턱에 박힌 작업실에는 매일 안개가 퍼진다는데. “원체 습한 것을 좋아한다. 그 습기가 가장 도드라진 게 물가풍경이고. 다만 작품의 장소는 실재하지 않은 장소다. 내 안의 풍경이라고 할까.” 프리드리히 그림 속 그 청년이 그랬듯, 바로 ‘내가 본 세계’란 소리다. 열심히 얇은 막을 쳐댔지만 비쳐 올라오는 바탕, 그 내면은 어쩔 수 없다는 뜻으로 읽혔다.
‘안개작가’의 꿈이 파블로 피카소와 연결되는 건 의외였다. 어린 시절에는 “피카소처럼 되는 것”, 지금은 “피카소처럼 살다가 죽는 것”이란다. 왜 하필 피카소였는지는 물어보지 못했다. 그림 잘 그리는 기교를 지칭한 ‘대명사’였는지, 남들은 보지 못한 세상을 집요하게 뚫어본 ‘손’이었는지, 혼란스러운 세상을 교묘하게 가리고 꼬집은 ‘이중 연막’이었는지. 전시는 12월 31일까지.
| 국제갤러리 이기봉 개인전 ‘당신이 서 있는 곳’ 전경. 한 관람객이 작가의 ‘당신이 서 있는 곳 그린’(Where You Stand Green·2022) 연작이 걸린 전시장에 한참 머물렀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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