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방한] "역사의 한 장"…치유로 빛난 시복식

by양승준 기자
2014.08.16 13:58:47

한국서 처음 열린 시복식
한국천주교로는 세 번째…두 번은 로마서
교황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복자 선언
"순교자들 정신, 사회화합에 영감"
"교황 보며 치유" 광화문에 수십만 시민 모여 환호

프란치스코 교황이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에 앞서 오픈카를 타고 이동하며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에게 손인사를 하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이데일리 양승준 기자·공동취재단]“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을 앞으로 복자라고 부르고 법으로 정한 장소와 방식에 따라 해마다 5월29일에 그분들의 축일을 거행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16일 오전 10시 서울 광화문광장.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천주교 순교자 124위에 대해 시복을 선언했다. 시복은 천주교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살았거나 순교해 공경 받는 사람들을 성인의 바로 전 단계인 복자로 선포하는 일이다. “와!” 한국 천주교의 역사적인 순간에 신자들의 환호성이 곳곳에서 터졌다. 교황이 순교자의 땅에서 미사를 직접 집전하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간 시복식은 교황청 내 시복·성을 담당하는 시성성 장관 추기경이 바티칸에서 주례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번 시복식은 전 세계 교회가 한국교회의 역량, 평신도들의 순교자 공경과 기도를 인정한 결과라 뜻깊다는 게 교황방한준비위원의 설명이다.

순교자 시복식이 한국에서 열린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 천주교 역사로는 세 번째다. 일제 강점기인 1925년(79위)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직후인 1968년(24위)에 열린 한국 순교자를 위한 시복식은 모두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렸다.

이번에 복자가 된 124위는 조선인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를 비롯해 남성 중심사회에서 여성 리더십을 발휘했던 여성회장 강완숙 골룸바, 정약용의 형이자 한글 교리서 ‘주교요지’를 집필한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백정 출신 황일광 시몬 등이다. 신분사회의 사슬을 끊고 신앙 안에서 인간 존엄과 평등, 이웃사랑의 정신을 실천한 이들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16일 서울 세종로 광화문광장에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시복식은 순교한 천주교 신자를 ‘복자(福者)’ 즉 성인 전 단계로 인정하는 의식으로 이번 시복식에서는 윤지충 바오로 등 124위가 복자로 선포됐다(사진=공동취재단).




시복미사를 집전한 교황은 스스로 자리 잡은 한국 천주교 역사에 의미를 뒀다. 교황은 강론에서 “하느님의 신비로운 섭리 안에서, 한국 땅에 닿게 된 그리스도교 신앙은 선교사들을 통해 전해지지 않았다”며 “한민족의 마음과 정신을 통해 이 땅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들어오게 됐다”고 했다. 또 “오늘은 모든 한국인에게 큰 기쁨의 날”이라면서 “순교자들이 남긴 유산, 곧 진리를 찾는 올곧은 마음, 그들이 신봉하고자 선택한 종교의 고귀한 원칙들에 대한 충실성, 그들이 증언한 애덕과 모든 이를 향한 연대성, 이 모든 것이 이제 한국인들에게 그 풍요로운 역사의 한 장이 되었다“고 의미를 뒀다. 순교자들의 유산이 ”더욱 정의롭고 자유로우며 화해를 이루는 사회를 위해 서로 화합하여 일하도록 영감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도 강조했다. 더 나아가 “온 세계에서 평화를 위해 그리고 진정한 인간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이바지하게 될 것”이라며 강조도 했다.

이날 시복미사는 간소하게 진행됐다. 봉헌예식도 전례에 필요한 것 외에는 다른 봉헌은 하지 않았다.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추구하는 교황의 뜻을 반영해서다. 성찬 전례에는 서울에서 커피전문점을 운영하면서 20년 동안 매일 첫 매상을 지구촌의 가난한 이웃을 위해 기부한 강지형·김향신 부부가 빵과 포도주를 예물로 바쳤다. 시복식에 쓰인 십자가도 크게 만들지 않았다. 인근 광화문과 조화를 위한 조처다. 제대 주변에는 복건을 쓴 아기예수와 비녀를 꽂은 성모가 한복을 입고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는 ‘한국사도의 모후상’이 놓이는 등 한국의 문화적 특성이 반영됐다. 오전 10시에 시작된 미사는 안명옥 주교의 시복 청원과 교황의 시복 선언, 교황 강론, 평화예식, 영성체 예식 등으로 2시간여 동안 진행됐다.

서울 세종로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한국천주교 순교자 124위에 대한 시복식 모습(사진=교황방한준비위원회).


교황은 시복식 전 광화문 퍼레이드로 신자 및 시민과 소통했다. 이날 현장에 모인 이들은 신자 17만 명을 포함해 100만 명이 몰렸다는 게 경찰의 추산이다. 교황은 카퍼레이드 도중 차에서 내려 단원고 희생자 김유민 양의 아버지인 김영오(47) 씨를 만나 손을 잡고 위로했다. 수시로 차를 세워 10여 명의 아이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이 자리는 교황과 시민과 만날 수 있는 가장 큰 자리였다. 이를 통해 시민은 “위로의 계기가 됐다”고 입을 모았다. 경기도 광주에서 온 안진우(37)씨는 ”교황이 보고 싶어 새벽에 두 딸과 아내와 함께 왔다“며 ”교황의 미소만 봐도 모든 억울함이 사라지는 것 같다. 정부가 교황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였으면 한다“고 말했다. 부산 양산서 온 채정숙(60)씨는 “낮은 곳에 임하는 교황을 본삼아 우리도 다시 한번 겸손하고 낮아지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염수정 추기경은 “이번 시복식을 통해 한국 교회가 우리 사회뿐 아니라 아시아와 세계의 복음화를 위한 빛과 소금이 되도록 노력하겠다”며 “순교자들의 피가 헛되지 않도록 우리가 더 복음화되어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더욱 봉사하며 그들과 복음의 기쁨을 나누는 교회가 되겠다”고 감사인사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