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김수헌 기자
2007.03.27 15:06:12
선진국 "대표기업이 곧 나라경제다"
기업경영, 경제성장률과 직결
경제 견인차 자부심 갖고 성장동력 찾도록 해야
[이데일리 김수헌기자] 한국경제가 '저성장의 늪' '중진국 함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저성장시대를 맞아 5% 이상 성장은 넘기 어려운 벽이다.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옛날같은 8~9% 고성장은 어렵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잠재성장률 자체가 낮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 나라의 경제성장은 현재의 성장률 뿐 아니라 잠재성장률까지 감안해 평가받는다.
선진국과 달리 우리 경제는 소비와 투자 수출간 연결고리가 약해지고, 내수와 수출이 따로 놀고 있는 형국이다. 기업과 가계의 경제심리가 아직 풀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저성장 국면을 돌파하는데는 기업들이 견인차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다. 기업활동에 힘이 실려야 한다.
지난 20년동안 한국기업은 '경제기적'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고 '경제위기(외환위기)'의 주범으로 몰리기도 했다. 기업은 이제 다시 한국경제 고성장을 이끄는 주역이 돼야 한다.
기업들은 이미 나라 안팎에서 새로운 성장동력, 미래 먹거리를 찾기위해 몸부림 치고 있다. 저성장 고착화를 깨기 위해 기업들은 어디서, 어떻게 뛰고 있는가. '정부-기업-국민'간 삼위일체는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가.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을 10회 연속시리즈를 통해 찾아본다.
지난 2004년 1월, 재정경제부와 통계청이 난데없이 발칵 뒤집혔다.
통계청이 매월 발표하는 '산업활동동향' 주요 수치가 발표 하루 전날 오후 증권가 등 금융시장에 퍼진 것.
정부는 유출경위를 파악하느라 부산을 떨었다. 시장과 언론은 정부의 허술한 경제지표관리를 강하게 질타하고 나섰다.
산업활동동향은 한마디로 '실물경제 종합성적표'다. 이를 통해 '생산' '소비' '투자' 등 현재 실물경제가 돌아가는 상황을 분석하고 진단할 수 있다. 때문에 다른 어느 지표보다 주식 채권 등 금융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산업활동동향을 구성하는 항목 중 가장 비중이 크고 중요한 게 '생산'지표다. 수백개의 표본 생산품목들이 얼마나 만들어져 출하됐고, 재고는 얼마나 쌓였으며 공장가동률은 얼마나 됐는지 등에 대한 수치들이 담겨있다.
쉽게 말해 생산 출하 재고 가동 등 기업의 경영활동이 요약돼 있다.
결국 기업의 생산활동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느냐 여부가 바로 금융시장에 직접적으로 적지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산업활동동향은 나중에는 한 나라의 경제성적을 말해주는 경제성장률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곧 기업활동이 종합경제성적표인 경제성장률과 직결된다는 뜻이다.
세계 최대 자동차회사 GM(제네럴모터스)는 지난 2005년 중반 최대 위기를 맞았다. 시장 점유율 하락과 과도한 복지수준, 은퇴직원들에 대한 건강보험 부담 등으로 수익이 크게 떨어졌다.
스탠다드 앤 푸어스(S&P) 등 세계적 신용평가사들은 냉정했다. GM의 회사채 신용등급을 잇달아 정크본드(투기등급 채권)로 강등시켰다. S&P, 피치에 이어 무디스가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GM쇼크'의 후폭풍은 미국에 한정되지만은 않았다.
GM 주가 급락과 회사채 연계 파생상품에 투자한 펀드들의 손실로 세계금융시장이 불안해졌다. 채권시장이 흔들리자 미국경제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당장 해외채권 발행에 나서던 하이닉스반도체와 LG전자 등 국내 대기업들의 자금조달계획에 차질이 빚어졌다. 당시 한덕수 재정경제부 장관 겸 부총리가 "GM발 쇼크가 한국경제에 미칠 영향을 점검하라"는 지시까지 내릴 정도였다.
이랬던 GM의 최고경영자가 최근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한 말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릭 왜고너 GM 회장은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자동차회사는 여전히 GM"이라고 자신했다. GM은 지난해 세계 자동차 판매 1등 자리를 도요타에 넘겨줬다.
왜고너 회장은 그러나 "도요타에 1등 자리를 아주 내 줄 생각은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곧 GM이고, GM은 곧 미국"이라고도 말했다.
찰스 어윈 윌슨의 1952년 발언을 연상시키는 발언이다. 윌슨은 당시 미국 국방장관에 발탁된 뒤 상원 청문회에서 "GM에 좋은 것은 미국에도 좋다(What is good for GM is good for America)"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미국 경제에서 GM이 차지하는 위상과 대표기업으로서 자부심, 자존심이 결합된 발언은 50여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도 변하지 않았다.
송병락 서울대 명예교수는 자신의 저서인 `한국경제의 길`에서 이같은 자존심의 뿌리를 이렇게 평가했다.
"선진국은 경제성장에 절대적 역할을 하는 기업의 중요성을 잘 안다. 그래서 기업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정책을 편다. 미국에는 기업을 보호하기 위한 여러 겹의 장치가 마련돼 있으며, 부시 대통령은 최근에도 대대적인 친기업정책을 폈다"
비록 도요타에 1등 자리를 내 주긴 했지만, 이런 정부가 버티고 있어 GM의 기(氣)는 꺾이지 않았다. 왜고너 회장은 "구조조정과 신제품 신기술 개발로 1위 자리를 탈환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한국이라면 어땠을까. 삼성전자는 지난해 500억 달러 수출고를 기록, 우리나라 전체 수출의 15%를 담당했다. 삼성 LG 현대차 SK 등 주요그룹 주력 계열사들이 나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막대하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최근 삼성전자의 주력사업 수익률 하락을 걱정하며 "나라경제가 우려된다. 이대로 가면 5~6년 뒤 위기가 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 뒤 정부 고위 관료들은 '샌드위치 경제' '위기 가능성'에 대해 "호들갑을 떤다"며 질타에 열을 올렸다.
최근 경제성장을 둘러싼 논란 중 두드러진 것이 일부 대선 주자들의 이른바 '7% 성장론'이다. KDI(한국개발연구원) 같은 곳은 "6~6.5% 수준의 경제성장은 가능하며, 5%만 해도 좋은 정책목표"라고 분석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일부 경제학자들은 7%의 실질성장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홍콩 싱가포르가 5%를 훌쩍 뛰어넘고 일본같은 성숙경제도 5% 수준에 육박하는데 한국이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임양택 한양대 경제금융대학장은 최근 한 칼럼에서 "우선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기업인들의 투자의욕을 북돋워야 한다"고 말했다.
시장경제의 주역인 기업이 뛰도록 해야 하며, 경제주체들이 공감하고 한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하는 리더십이 있으면 7% 성장은 충분히 달성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저성장을 벗어나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리는 견인차는 역시 기업이다. 요즘 기업인들을 만나보면 너나 할 것 없이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는데 고심하고 있다.
중견그룹들은 인수합병(M&A)을 통한 미래 먹거리를 찾는데 혈안이 돼있다. 아마 눈을 불을 켜고 있다는 말이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어떤 기업인들은 "M&A 대상이 될만한 물건이 있으면 연락을 달라"고 까지 한다.
그만큼 먹고사는 문제가 절실하다는 것이다. 새로운 사업에 새로 진출하기에는 시간이 너무나 부족하고 비용이 많이 든다.
그런데 이런 과정에서 항상 맞닥뜨리는 것은 이런저런 규제들이다. 합리적 규제는 필요하다. 그러나 합리적이지 않다고 오랫동안 지적받아 왔고, 정부 내에서조차 비판받는 규제들이 부처간 알력의 와중에 버젓이 살아남는 게 문제다.
5% 성장의 벽, 어떻게 뛰어넘을 것인가. 경제 전문가들은 새로운 답을 찾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답은 나와있다. 나라경제가 성장하려면 기업이 성장해야 한다. 한국 기업들이 GM과 같은 자부심과 자존심을 갖게 해줘야 한다. 저성장의 늪을 헤쳐나오는 답은 바로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