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수의 월가 키워드)Office Politics
by정명수 기자
2004.09.23 13:28:08
[뉴욕=edaily 정명수특파원] 머리가 좋은 상사는 모시기가 힘들다. 그 상사가 부지런하다면 더욱 힘들다. 그러나 머리도 좋지 않으면서 부지런하기만 한 상사는 진짜 구제 불능이다. 실력만으로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에는 뭔가 부족한 세상이다. 직장에서도 정치적 술수가 필요하다.(Office Politics)
노름에서 돈 따는 것은 `운칠기삼`이라고 했던가. 최고 경영자(CEO)가 되는 것은 어떨까.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운이 따르는 사람을 당해 낼 수 없다는 말도 있다. 여기 기가 막히게 운(?)이 좋으면서 정치 감각도 뛰어난 CEO가 있다.
옛날 옛날 한 옛날에,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 RJR나비스코라는 회사가 있었다.
◇기업의 탄생
RJR나비스코는 담배 회사인 RJ레이놀즈와 식품 회사인 나비스코가 합쳐진 기업이다.
RJR의 역사는 18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리차드 조슈아 레이놀즈(Richard Joshua Reynols)는 남북 전쟁 이후 북부에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 남부 버지니아와 노스 캐롤라이나 일대에서 담배 농장을 하고 있었다.
그는 노스 캐롤라이나 윈스톤-살램 지방이 미국 최고의 담배 산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윈스톤-살램은 원래 체코 이민자들이 개척한 땅이다. 1753년 잉글랜드의 그랜빌 공작으로부터 10만에이커의 땅을 사들여 이곳으로 이주했다. 이들 모라비안(Moravians)은 손재주가 뛰어나고, 농업에도 능했다. 산업을 번창시켰고, 와코비아(Wachovia)라는 탄탄한 은행을 만들기도 했다.
RJ레이놀즈는 윈스톤-살램에 작은 담배 공장을 열었다. 그는 북부 `담배 카르텔`의 공격을 적절히 피하면서 씹는 담배에 이어 파이프 담배로 사업 영역을 넓혀갔다.
RJ레이놀즈는 지방의 유력자가 됐고, 회사와 지역사회를 한 덩어리로 만들었다. 나중에 `미스터 RJ`로 불린 그는 회사 주식을 종업원들에게 골고루 나눠주기도 했다.
미스터 RJ는 담배 공장에서 살다시피하면서 새로운 상품 개발에 열을 올렸다. 필생의 제품 `카멜(Camel)`은 이렇게 탄생됐다. 미스터 RJ는 미국 최초로 `시가렛(cigarette)`을 대량 생산한 인물이다. 씹는 담배, 파이프 담배에서 본격적인 궐련의 시대를 개막한 것이다.
1930년대 RJR은 담배의 대명사였다. RJR 직원들은 대부분 윈스톤-살램 지방 사람들로, 회사 주주이기도 했다. RJR은 주주들에게 높은 배당을 마다하지 않았다.
RJR 주식은 대를 이어 상속됐다. `Barbarians at the gate`라는 책은 RJR의 영광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아버지는 "이 주식을 절대로 팔면 안된다"는 유언을 남기고 아들에게 RJR 주식을 넘겼다. RJR은 전 직원과 가족들에게 의료비를 보조했다. 점심식사가 제공됐고, 뜨거운 담배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위해서 항상 아이스 워터가 준비돼 있었다."
RJR의 눈부신 성장은 1960년대 중반까지 계속된다. 윈스톤(Winston), 살램(Salem) 같은 히트 상품이 잇따라 나왔다. 1960년 미국 남성의 58%, 여성의 36%가 담배를 즐겼다. RJR은 그 많은 돈을 어떻게 와코비아로 입금시키는가를 고민해야했다.
RJR의 기업 문화는 미국 남부의 보수주의와 청빈한 생활을 신조로 여기는 모라비안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RJR 임원들은 뷰익 이상의 자동차를 타지 않았다. RJR의 CEO들은 대부분 어린시절부터 담배 농장에서 자라난 토박이였다. RJR은 거대한 가족 기업이었다.
◇"이사회를 장악하라"
1964년 외과의사인 루터 테리가 `담배 연기와 암의 관계`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담배 매출이 급감하기 시작했다. RJR은 담배 이외의 다른 사업을 찾지 않으면 안됐다. 마침 필립모리스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나타났다. `말보로(Marlboro)`를 앞세운 필립모리스는 세계 시장을 공략, 남부의 가족 기업 RJR을 압박했다.
RJR은 사업 다각화를 추진했고, 윈스턴-살램 출신이 아닌 경영자들이 하나 둘 회사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폴 스티치도 그 중 하나였다. 그는 담배는 잘 몰랐지만, RJR같은 부자 회사를 어떻게 운영해야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스티치는 회사 제트기를 타고 뉴욕과 워싱턴을 오가며 정재계에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미츠미시, 도이체방크의 CEO 등이 참여하는 국제 자문 그룹을 만들었고, 상공회의소 활동도 열심이었다. 남부 시골의 가족 기업을 바깥 세상으로 끌고 나왔다.
그는 지역 출신이 아니라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이사들을 하나 둘 자기 편으로 만들어갔다. 1970년대 스티치는 RJR을 이끌면서 말보로와의 전쟁을 계속했고, 한편으로는 선박회사, 정유회사를 사들였다. KFC와 같은 식품회사를 인수하기도 했다.
1980년대 RJR 이사회는 스티치에게 후계자를 물색하도록 권고했다. 후계 구도는 매우 복잡했다. RJR이 사업 다각화를 면서 외부에서 영입된 경영진과 그룹의 주력인 담배 부문을 이끌어온 토박이 경영진 사이에 알력이 발생했다.
타이리 윌슨과 애드 호리건은 담배 사업 부문의 책임자로 그룹의 적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힉스 월드론은 GE 출신으로 RJR이 주류 회사를 인수할 때 경영진에 새롭게 합류했다. 스티치와 이사회는 내심 월드론을 후계자로 내세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를 눈치챈 윌슨은 배수의 진을 쳤다.
윌슨은 이사회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스티치는 외부인으로서 경영권을 확립하기 위해 이사회 멤버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반면 윌슨은 이사회 멤버 중 한명이 운영하는 회사로부터 물품 구매를 늘려달라는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할 정도로 원칙주의자였다.
윌슨은 호리건과 연합, 스티치 회장과 최후의 담판을 벌였다. 만약 월드론이 CEO가 되면 자신과 호리건, 담배 사업 부문을 담당하는 임원 전원이 회사를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스티치는 윌슨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를 후계자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1983년 윌슨은 CEO가 됐다. 스티치는 경영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이사회 멤버로 남았다. 윌슨은 스티치와 이사회를 신뢰하지 않았다. 스티치의 입김이 작용하는 이사회도 윌슨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윌슨은 방만한 사업 다각화를 중지하고, 식품 사업에 초점을 맞췄다. RJR의 수익성이 좋아졌기 때문에 이사회도 윌슨을 어쩌지 못했다.
자신만만한 윌슨은 이사회 몰래 두 가지 비밀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하나는 식품회사인 나비스코와의 합병, 다른 하나는 암호명 `스파(Spa)`로 명명된 신상품 개발이었다.
◇놀기 좋아하는 CEO
나비스코의 CEO 로스 존슨은 파티를 좋아했다. 캐나다 출신인 존슨은 젊은 시절 친구들과 밤새워 술을 마시며 어울렸다. 술 친구 중에는 나중에 캐나다 수상이 된 변호사도 있었다.
천성적으로 사람을 좋아하고, 위트가 넘쳤던 존슨은 40대까지 이렇다할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30대에 캐나다 GE의 영업사원으로 일하면서 알게된 선배가 "모든 조직은 성립되는 순간부터 무너지기 시작한다"고 한 말을 경영 철칙으로 여겼다.
그는 한 자리에 오래 머무는 타입이 아니었다.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냈다. 그는 스탠다드 브랜드라는 식품회사로 직장을 옮기면서 뉴욕으로 이주한다.
뉴욕에서도 그는 술친구들을 만들었다. 스포츠 스타에서부터 아메리칸익스프레스 최고 경영자까지 넓은 오지랖을 자랑했다.
1970년대 스탠다드 브랜드는 뉴욕증권거래소 상장 기업이면서도 `모던 매니지먼트`에 눈뜨지 못했다. 당시 CEO였던 헨리 웨이글은 20년째 회사 경영을 해왔지만, 임원들은 해외 출장을 갈 때도 비스니스 클레스를 이용하지 못하게 했다. 낡은 리놀륨 마루에 구식 철재 책상을 몇십년째 쓰고 있었다.
존슨은 이사회 멤버들과 친하게 됐다. 함께 파티를 벌이며 밤새워 회사 경영에 대해 얘기하곤 했다. 웨이글은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는 존슨에게 껍데기나 다름없는 회사의 화학 부문을 매각하라는 `미션 임파서블`을 명령한다.
존슨은 "경영이 잘 못됐기 때문에 화학 부문의 성장 가능성이 묻혀 있는 것"이라는 역설적인 매각 전략을 구사해서 2300만달러를 받아낸다. 웨이글은 존슨의 보고를 받고, 2400만달러 이하로는 절대 팔지 못한다고 생떼를 썼다. 존슨은 인수자를 다시 찾아가 100만달러는 나중에 되돌려준다는 조건으로 계약서를 작성한다. 존슨은 이사회 친구들과 감사의 도움을 받아 100만달러를 회계상 보조금으로 처리해버린다.
마침내 이사회는 웨이글을 몰아내고 존슨을 CEO로 임명한다. 존슨은 반란의 주역인 이사들의 봉급을 2배로 올리고, 낡은 철재 책상을 내다 버리게 했다. 회사 전용 제트기도 샀다.
존슨은 새로운 아이디어라면 비용이 얼마가 들어가든지 상관하지 않았다. 스포츠 스타에게 연간 40만달러를 주면서 그의 이름을 딴 스낵을 내놓기도 했다.
존슨은 이사회를 그의 편으로 만들었다. 하루는 멕시코 합작법인의 회계장부에서 이상이 발견됐다. 이사회는 존슨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존슨도 회계 부정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합작사의 `특수 사정` 때문에 미국식 회계를 일방적으로 강요할 수 없었다.
존슨은 난감했지만, 특유의 재치를 발휘했다. "여러분 수상 스키를 신고 모터 보트를 끌어보신 적이 있어요?" 이사회는 웃음 바다가 됐다.
존슨이 스탠다드 브랜드를 경영하는 것이 식상해질 즈음인 1981년 리츠와 오레오 쿠키로 유명한 나비스코가 M&A 제의를 해온다.
나비스코는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브랜드였지만, 1960년 이후 제자리 걸음을 계속하고 있었다. 나비스코의 CEO였던 봅 쉐벌은 합병을 통해 기업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 넣으려 했다.
존슨은 나비스코와의 합병을 멋지게 성사시켰다. 주식 스왑 방식으로 진행된 양사의 합병은 19억달러 규모였다. 쉐벌은 CEO를, 존슨은 COO를 맡았다. 회사 이름은 `나비스코 브랜드`가 됐다.
존슨은 이번에도 이사회를 자기 편으로 만들었다. 나비스코측 핵심 경영진들을 서서히 제거하고, 자기 사람을 대신 앉혔다.
나비스코 CFO로 합병 당시 최고의 실력자였던 딕 오웬도 존슨의 적수는 아니었다. 오웬은 부사장 자리를 원했다. 오웬은 회사 곳곳에 자신의 사람들을 심었다. 존슨은 군소리없이 오웬의 요구를 들어줬다.
존슨은 어느날 쉐벌을 찾아간다. "회장님, 오웬이 너무 거대한 재무 조직을 만들고 있습니다."
쉐벌 회장은 나비스코가 관료화되는 것이 싫었다. 스탠다드 브랜드와의 합병도 그런 이유로 추진된 것이다.
쉐벌 회장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존슨에게 물었다.
존슨은 "바꿔야지요. 오웬은 조직 규모를 줄일 수 없을 겁니다. 제가 그걸 하죠"라고 말했다. 존슨은 재빨리 스탠다드 브랜드 출신을 재무조직에 앉히기 시작했다. 존슨과 그 측근 이외에는 새로운 재무관리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나비스코 출신 임원들은 하나 둘 실권을 내놓게 됐다.
합병 3년만에 24명의 핵심 임원중 21명이 존슨의 측근으로 채워졌다. 나비스코파는 소리소문없이 실려 나갔다.
1980년대 중반 존슨이 나비스코 브랜드를 장악하려는 시기, 미국에서는 과자 전쟁이 벌어졌다. P&G가 나비스코의 아성인 켄자스 시티에서 소프트 쿠키를 전격적으로 판매하기 시작한 것.
나비스코는 일격을 당했지만, 곧바로 반격에 나섰고, 전국적인 판매망을 이용해 P&G의 시장 진입을 봉쇄했다. 존슨의 입지는 더욱 강화됐고, 마침내 1984년 존슨은 CEO가 된다.
존슨은 은퇴하는 봅 쉐벌 회장의 이름을 딴 R&D 연구소를 개관함으로써 마지막 순간까지 쉐벌 회장의 칭찬을 받는다.
놀기 좋아하는 존슨은 나비스코가 후원하는 초호화 여자 프로 골프 대회를 개최한다. 이것이 지금 LPGA 메이저 대회 중 하나인 나비스코 챔피언십의 시작이다.
◇굴러 들어온 돌
종합 식품 그룹으로 도약을 꿈꾸고 있는 RJR의 윌슨은 세가지 카드가 있었다. RJR의 오래된 월스트리트 파트너인 딜론 리드는 몇개월간의 분석 끝에 합병 대상 기업으로 펩시코, 켈로그, 나비스코 3곳을 선정해줬다.
펩시코와 켈로그는 합병 제의를 거절했다. 나비스코의 존슨은 우호적으로 나왔다. 윌슨과 존슨은 나이가 같았다. 윌슨은 3년후 65세가 되면 은퇴를 할 것이라며 존슨이 차기 CEO가 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1985년 4월 두 사람은 각자의 이사회에 합병 협상을 보고하고 논의를 진척시키기로한다.
RJR 이사회는 윌슨이 사후에 이같은 중요한 사안을 보고한 것에 대해 역정부터 냈다. 윌슨은 합병 논의는 이제 막 시작한 것이기 때문에 이사회에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사회는 차기 회장 구도를 상대편에 제안한 것이나, 주식 스왑 방식의 합병에 대해서도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
윌슨은 "존슨은 결국 2인자에 머무를 것이고, RJR이 나비스코를 현금 인수하는 방향으로 협상을 바꾸겠다"고 답했다.
존슨은 노련하게 협상에 임했다. 그는 윌슨이 딜을 애타게 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협상 중 두 회사의 M&A 논의가 월가에 알려지면서 주가가 급등하는 사고까지 발생했다.
윌슨은 80달러 이상은 절대 안된다고 버텼지만, 결국 주당 85달러, 49억달러 규모의 합병에 동의하고 만다. 1985년 5월 양사의 합병이 공식 발표됐다.
윌슨에게는 풀어야할 숙제가 남아 있었다. 자신이 스티치를 압박, CEO가 될 때 연합전선을 폈던 호리건을 설득하는 일이다. 존슨에게 2인자 자리를 주려면 호리건이 물러서야했다.
호리건은 애초 약속과 다르다며 윌슨에게 소리를 질렀다. 윌슨은 회장실을 신설하고, 3명이 함께 회사 경영을 논의하자며 호리건을 다독거린다.
호리건은 존슨이 어떻게 나비스코를 장악했는지 알고 있었다. 호리건은 "윌슨 회장님 조심하십시요. 존슨은 18개월 안에 당신 자리에 앉을 겁니다"라고 경고한다.
윌슨은 그러나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존슨과 그의 측근들은 윌슨의 꼼꼼함 때문에 기를 펴지 못했다.
존슨은 자신의 방식대로 RJR측 이사진과 친분을 쌓아갔다. 특히 이사회의 핵심인 스티치의 호감을 사는데 성공했다. 존슨은 스티치와 윌슨의 틈이 생각보다 더 크게 벌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윌슨과 존슨은 처음에는 호흡이 잘 맞았다. 대형 회사가 합병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작은 사업 부문들은 떨어져 나가게 된다. 존슨은 어떤 사업 부문을 팔 것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윌슨의 구미에 맞게 행동했다.
작은 음료 회사를 팔 때 일이다. 윌슨은 이사회에 참석, 이 회사를 팔아야할 5가지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반면 존슨은 재치있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걸(매각해야할 음료 회사) 끌고 물위를 걸어 갈 수는 있을 겁니다. 이런 젠장! 이게 뭡니까. 강 건너 편에는 코카콜라와 펩시코에서 나온 선수들이 떡 기다리고 있겠죠."
존슨은 이런 식으로 RJR측 이사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윌슨의 몰락은 예고된 것인지도 모른다. 윌슨은 이사회 몰래 신상품을 개발하고 있었다. 암호명 스파, 즉 연기 안나는 담배였다.
윌슨은 이사회에 보고도 하지 않은 채 6800만달러라는 연구비를 지원하며 제품 개발에 몰입했다. 윌슨은 수년이 걸리는 연구인데다, 아이디어 단계여서 이사회에 보고하지 않았다고 둘러댔다.
사실 윌슨은 이사회를 믿지 못했기 때문에 이를 숨겨온 것이었다. 스티치를 비롯한 이사들은 윌슨에게서 완전히 돌아섰다.
존슨은 때를 놓치지 않았다. 존슨은 시티치와 핵심 이사들과 비밀 회동을 가졌다. 시티치는 "당신이 여기에 왜 이렇게 늦게 나타났는지 모르겠어요"라며 노골적으로 존슨에게 지지 의사를 밝혔다.
1986년 이사회는 윌슨을 조기 은퇴시키고, 존슨을 새로운 CEO로 발표한다. 윌슨은 대세가 기울었음을 나중에야 인식하고는 순순히 회사를 떠났다.
존슨은 연간 10억달러의 현금을 주무르는, 미국내 19위의 대기업 CEO가 됐다. RJR나비스코 이사회가 정말로 바른 선택을 한 것인지는 오래지 않아 판가름이 났다.
존슨의 운과 정치력도 거기까지였던 모양이다. 2년후 RJR나비스코는 미국 최대의 LBO(Leverage Buy Out)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존슨은 스스로 그 소용돌이 속으로 회사를 몰아넣었다. LBO 전문 기업 사냥꾼에 넘어간 RJR나비스코는 풍비박산 일보 직전까지 간다. RJR과 나비스코는 다시 분리돼 제3의 기업으로 넘어가는 처절한 운명을 맞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