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고 무모한 독재자? 김정은, ‘남한땅 12시간’ 행보는 달랐다

by김미영 기자
2018.04.29 17:05:07

‘전 세계 생중계’ 부담에도 여유로운 임기응변 구사
北 열악한 환경 인정하는 ‘솔직함’, 말실수엔 ‘재치’ 발휘
합리성-과감한 추진력 갖춘 국제정치인 면모 과시

27일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만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사진=한국공동사진기자단)
[이데일리 김미영 기자] ‘나이 어린 무모한 독재자’ 이미지가 강했던 탓일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7일 12시간 동안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남한땅에 머물면서 보여준 실제 모습은 전 세계에 연신 놀라움을 자아냈다.

숨소리까지 생중계되는 상황에서 김 위원장은 여유를 잃지 않았고, 파격적인 동시에 솔직하고 겸손한 화법을 구사했다. 무모함보단 합리성이 돋보였고,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드러내기도 하면서 부정적 이미지를 상당 부분 걷어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김 위원장의 파격이 가장 두드러졌던 때는 단연 문재인 대통령을 판문점 군사분계선(MDL) 넘어 북측으로 이끈 순간이다. 각본에 없었던 동선으로, 문 대통령의 짧은 ‘월경’을 지켜본 이들을 크게 당황케한 순간이기도 하다.

이날 오전9시 30분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한땅을 밟은 김 위원장은 문 대통령과 악수했다. 문 대통령이 “나는 언제쯤 (북측으로) 넘어갈 수 있겠느냐”고 말하자, 김 위원장은 “그러면 지금 넘어가 볼까요”라며 ‘즉흥적’으로 문 대통령을 이끌었다.

문 대통령과 판문점 남측 평화집에서 회담 전 환담을 가진 김 위원장은 만찬 메뉴로 정해진 옥류관 평양냉면을 소개하며 웃음을 자아냈다. 김 위원장은 “어렵사리 평양에서부터 평양냉면을 가져왔다. 가져왔는데 대통령님께서 좀 편한 마음으로 평양냉면, 멀리 온... 멀다고 말하면 안 되겠구나”라며 “좀 맛있게 드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평양에서 판문점까지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점을 떠올리고 재치 있게 넘긴 발언으로, 남과 북의 심리적 거리가 멀 뿐 실제 거리는 멀지 않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네티즌들에게 회자됐다.

김 위원장의 솔직한 화법도 눈길을 끌었다. 김 위원장은 “북측을 통해 꼭 백두산에 가보고 싶다”는 문 대통령의 말에 “문 대통령께서 오시면 솔직히 걱정스러운 것이 우리 교통이 불비해서 불편을 드릴 것 같다”고 답했다. 김 위원장은 “평창올림픽 갔다 온 분들이 말하는데, 평창 고속열차가 다 좋다고 하더라”며 “남측의 이런 환경에 있다가 북에 오면 참으로 민망스러울 수 있겠다. 우리도 준비해서 대통령께서 오시면 편히 모실 수 있게 하겠다”고 했다.

이 발언이 알려지자, 김 위원장 스스로 북한 교통시설의 열악함과 낙후함을 인정하고 남한과 비교했다는 점이 놀랍다는 반응이 터져나왔다. 아울러 김 위원장이 지난해 신년사에서 “언제나 늘 마음뿐이었고 능력이 따라서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자책 속에 한 해를 보냈다”며 자신의 부족함을 토로했던 발언도 재조명됐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김 위원장의 솔직한 면모가 확인됐다는 평가다.

김 위원장은 스스로 합리성을 갖춘 지도자라는 점도 부각시켰다. 김 위원장은 정상회담 당시 “미국이 북한에 대해 체질적 거부감을 갖고 있지만, 우리와 대화해보면 내가 남쪽이나 태평양상으로 핵을 쏘거나 미국을 겨냥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 위원장은 “앞으로 자주 만나 미국과 신뢰가 쌓이고 종전과 불가침을 약속하면, 왜 우리가 핵을 가지고 어렵게 살겠느냐”고도 했다.

약속한 것은 지키고 실천한다는 의지를 드러 낸 발언도 여러 차례 쏟아냈다. 김 위원장은 환담에서 “이제 마음 단단히 굳게 먹고 다시 원점으로 오는 일이 없어야겠다. 앞으로 우리도 잘하겠다”고 했고, “김여정 부부장의 부서에서 ‘만리마 속도전’이라는 말을 만들었는데, 남과 북의 통일의 속도로 삼자”고도 했다.

한편 김 위원장은 호칭에도 신경을 기울이며 세심한 모습을 연출했다. 문 대통령을 향해선 “대통령님”으로 깍듯이 존칭을 썼고, “내가”라는 표현 대신 자주 “제가”라고 스스로를 칭하며 몸을 낮췄다. ‘판문점 선언문’에 서명한 뒤 사상 처음으로 외신 기자회견에 나섰던 김 위원장은 “우리 만남에 커다란 기대를 표시해준 기자 여러분들께도 사의를 표한다”고 말을 마쳤다. 언론에도 주의를 기울여, ‘국제정치인’으로서 인정받기 위한 언행을 구사한 것으로 보인다.